6세기초에 게르만족의 이동 시기가 정리되면서 현재 프랑스(피레네산맥까지),독일(엘베강까지), 로마에 이르는 거대한 프랑크왕국이 자리를 잡는다. 프랑크왕국은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로 프랑크족은 앵글로색슨족, 부르군트족, 동고트족 등등과 같이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넘어 온 부족들(게르만)의 이동에 의해 연쇄적으로 이동한 비라틴 부족들 중 하나이다. 이 왕국은 751년 실력자 카롤루스가문에 떨어진다. 로마인들에 의하면, 게르만족은 렉스(rex)라는 부족장들의 왕을 실력있는 유력가문에서 선출한다. 선거과정은 형식적이었다.
카롤루스왕가의 개척자 키작은 피피누스(Pippinus Brevis)는 프랑크왕국의 그 전 왕가를 폐위시키고 쿠데타로 왕이 된 사람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교황으로부터 직접은 아니지만 도유식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 때부터 프랑스왕들은 교황의 축성을 받는 전통이 생긴다. 피피누스는 그후 756년에 일부 영토를 교황에게 바침으로써 교황령이 탄생하는 토대를 마련한다.
800년에 키작은 피피누스의 아들 위대한 카롤루스(Carolus Magnus)는 교황의 주도 하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임명된다. 이 황제 자리는 곧 신성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제국의 중심부는 아헨이다. 이후 신성로마제국황제의 대관식은 여기서 거행된다. 그러나 이동과 통신의 제약 등으로 프랑크왕국은 곧바로 분할된다. 게르만법에 의하면 상속에 의해서 왕국은 쪼개지게 되어있다.
위대한 카롤루스의 사후에 유일한 세 손자에 의해 그의 대제국은 3분할된다. 이를 베르됭조약(843년)이라고 한다. 최종적으로는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위대한 카롤루스의 장손의 세 아들들은 이탈리아(프로방스, 제네바에 이르고 남쪽은 로마 교황령 위쪽부터 시작한다.)를 상속받고 프랑스 쪽은 대머리왕 샤를 계열이, 독일 쪽은 루드비히 계열이 차지한다.
919년에 독일 지역의 카롤루스 대는 끊기고 작센족 계열의 왕이 선출된다. (오토왕조= 작센왕조= 류돌핑어) 오토1세(오토 대제)는 로마 교황령을 군사적으로 구해주고 예전 위대한 카롤루스에 이어 아헨에서 황제의 관을 받는다.(962년) 이 때부터 독일 지역의 왕들이 황제를 겸임한다.
987년 카롤루스왕가의 마지막 프랑스 지역 왕 루이 5세가 사망하자 게르만법에 따라 선출에 의해 위그 카페(Hugh Capet)가 그 뒤를 잇는다. 위그 카페는 오토1세의 외조카이다. 위그 카페 초창기에 직할령은 '프랑스 섬(일 드 프랑스)'으로 불리는 파리 주변부에 국한되서 브리타니나 아키텐 등 다른 부족장들에 비해 힘도 없었고, 또한 그래서 위그 카페는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이 왕조는 성장하고 1328년까지 유지된다.
잉글랜드왕도 형식적으로는 프랑스왕의 신하였는데 카페왕조의 존엄왕 필리프 2세는 봉건적 계약 위반을 이유로 잉글랜드 존 왕의 프랑스 영지를 몰수하여 직할 영지로 편입한다.(1214년 부빈전투) 존 왕은 프랑스에서 노르망디, 앙주, 투렝을 빼앗기고 아키텐, 가스코뉴와 기엔의 해안가만 남게 된다. 이 때문에 존 왕은 잉글랜드 내 봉건 귀족들로부터 마그나 카르타를 강요받게 된 것 영국에서 의회제도의 기초가 놓여지게 된 것 등이 유명하다.필리프 2세는 남프랑스 툴루즈도 영토에 편입시킨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왕들은 골치 아픈 대봉건귀족의 영지를 몰수하여 직할지에 편입하거나 결혼을 통해 합병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1328년 카페 왕조의 대가 끊기는데 상속권은 마지막 카페가문의 왕인 필리프 4세의 조카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와 외손자인 잉글랜드 국왕에 있었다. 프랑스왕은 발루아가문에게 주어졌다. 잉글랜드왕은 동시에 프랑스왕국의 귀족으로 보르도와인이 생산되는 가스코뉴 지방을 영지로 갖고 있었다. 1337년 프랑스왕이 가스코뉴를 잉글랜드왕에게서 몰수하려고 하자 잉글랜드왕은 상속권분쟁과 함께 백년전쟁을 개시한다. 결과적으로 1452년에 잉글랜드왕은 프랑스 내의 모든 영지를 잃는다. 그 후 루이 11세(1461-1483)는 결혼 등을 통하여 브르고뉴, 앙주, 프로방스, 가스코뉴 등을 흡수하여 명실공히 프랑스의 거의 모든 영토를 왕령지로 합병한다.
반면 독일은 오토왕조부터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독일 본토의 정치보다 더 중요시했다. 독일왕(=신성로마제국황제)들은 제국을 남부 이탈리아까지 확장하는데 신경썼다. 또한 바바로사 프리드리히 황제는 웰프가문의 하인리히로부터 영지 바이에른을 몰수하여 자기 영지에 편입하지 않고 다른 제후들에게 나눠준다. 이는 프랑스와는 다른 처리 방식인데 독일왕들은 프랑스왕들과는 달리 그럴 수밖에 없었고 이는 독일 지역에 영국, 프랑스와 같이 강력한 왕국이 등장하지 못한 또다른 이유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15세기 말경에는 잉글랜드나 프랑스에 강력한 왕권이 성립한 것과는 달리 독일 지역은 비텔스바흐가문(바이에른, 팔츠선제후국, 스웨덴왕국, 그리스왕국), 웰프가문(지금의 니더작센 지역, 영국의 하노버왕가), 안할트(아스카니아)가문(작센-안할트 지역), 베틴가문(튜링겐, 작센주, 폴란드왕국),룩셈부르크가문(룩셈부르크 공국, 보헤미아 왕국), 합스부르크가문 등의 대가문들로 세력 균형을 이루어 일종의 부족국가형태로 존속하다가 16세기에는 종교개혁으로 공식적으로 분열이 고착화되고 17세기초에 30년 전쟁으로 1871년까지 그런 부족국가 상태가 유지된다. 같은 비텔스바흐가문이지만 바이에른 선제후국은 가톨릭이였고 팔츠선제후국은 장로교국으로 선언했으니 독일왕이라는 개념은 흐릿해지고 대신 주로 합스부르크가문 중심의 신성로마제국황제가 오스트리아 등의 가톨릭계열 가문 영지와 이탈리아에 신경쓰는 모양새가 된다.
독일 지역의 제후들이 통일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다면 자연스럽게 슐레스비히 공작, 하노버 왕, 룩셈부르크 공작, 작센선제후 등이 주요 멤버가 되는데 이들이 각각 덴마크왕, 영국왕, 네덜란드국왕, 폴란드왕을 개인적으로 겸임하고는 했으므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이라는 협상에 의한 국가의 성립 비준은 어려운 일이 된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78460388?OzSrank=1
http://www.yes24.com/Product/Goods/24522259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5490?OzSrank=1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 낭만주의라는 보물섬 (0) | 2021.07.08 |
---|---|
영국의 성공회의 역사 (0) | 2021.06.14 |
칼리지와 유니베르시타스, 네이션 (0) | 2021.05.28 |
Tax Farming, 징세청부업 (0) | 2021.05.26 |
천국과 지옥 (0) | 2021.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