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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과 미국의 반독일 정서의 발흥

2021. 10. 3.

 

"부어스틴에 따르면, '1880년대 미국의 야심 찬 젊은 역사가들과 정치학자들은 독일에 공부하려고 몰려갔다. 돌아올 때 그들은 박사학위를 가지고 왔다.'"(강준만, 미국사 산책 4)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15년 5월 영국의 루시타니아호에 탄 미국인 128명이 독일의 U보트 공격으로 숨졌을 때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아일랜드계와 독일계는 미국이 영국과 동맹을 맺을까봐 걱정했다. 유대계 미국인 상당수가 독일계였는데 이들도 독일의 가족들을 걱정했고, 유대인을 가장 많이 탄압하는 제정러시아와 미국이 손을 잡을 것을 우려했다. 

 

독일이 무제한잠수함 작전을 벌이고 독일 외무상 짐머만이 멕시코에 보낸, 대미 전쟁을 부추기는 내용의 전문이 밝혀지자 1917년 4월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반독일 히스테리가 거세게 밀려왔다. 독일어 신문들을 폐간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판매가 금지되기도 했다. 교육과정에서 독일어가 빠지는 학교가 생겼다. 도서관에서 독일어 책을 불태웠다. 델라웨어주, 몬태나주 등 몇 개 주에서는 독일어 교습을 금지시켰다. 대학에서도 독일의 위상이 쇠퇴했고 미국 문학이 탄탄한 위상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에 독일계는 500만 명이었고 이민자 그룹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고 높은 지위를 누린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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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 산책 5 - YES24

강준만 교수의 미국사에 대한 종합적인 소개강준만은 우리사회에서 다작으로 유명한 저술가이다. 18권으로 구성된 『한국 현대사 산책』과 10권으로 이루어진 『한국 근대사 산책』은 그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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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앤더슨, 「아라비아의 로렌스 」(2013)/정태영 옮김(2017, 글항아리)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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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지난 백 년간 중동에 불어닥친 흉폭한 역사!한 줌의 모험가와 새파란 장교들이 판치고 다녔던 사막의 무대에서 로렌스의 어두운 면과 심각한 결점을 세밀하게 재건하는 저자는 현대 중동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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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와  대영제국은 1914년 9월 정도에 본격적인 제1차대전에 돌입한 후에 모두 지하드(이슬람의 무장 투쟁)와 시오니즘을 두고 경쟁했다.

 

1차 대전이 시작하고 한참 뒤인 1914년 11월에 오스만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결정했다. 시리아의 오스만 총독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 메디나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 서안을 아우르는 헤자즈지역의 후세인 족장(샤리프)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대신 전후 독립을 약속한다. 오스만제국의 서쪽 변방인 이곳은 영국령 수에즈운하 및 홍해와 맞닿아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영국도 그 이전부터 후세인과 접촉을 갖고있었다. 영국은 협력의 댓가로 전후 지금의 아라비아반도와 시리아,이라크,요르단,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지역에 아랍 국가 설립을 승인해 줄 것임을 후세인에게 약속한다. (맥마흔-후세인 협정 1916.5) 후세인은 1916.6월 경에 아랍 반란을 일으킨다. 후세인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오스만제국을 지배하는 청년 투르크당의 근대화 정책 등과 갈등을 일으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똑같은 시기에 프랑스와 전후 시리아를 프랑스가 차지하고 이라크를 영국이 차지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에 있는 시리아 땅의 가톨릭 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게다가 1917. 11월엔 영국이 벨푸어선언을 하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을 승인하는 내용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은 후세인을 영국 앞잡이 내지는 영국에 놀아난 인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후세인은 이런 불리한 입지에서 아랍 반란을 지도해 나가게 된다. 세 협정의 영국 상대방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른 협정의 내용을 공식적으로는 모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유대인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내 팔레스타인의 땅을 조금씩 사들이는 형태로 움직였다. 그것을 반대하는 유대인 공동체도 많았다. 그러한 움직임이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지역공동체와 민주주의 시스템으로부터 고립시킨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협력을 맺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는 과정에서 제국 내에서 러시아와 친화적인 아르메니아인들 150만 명을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인종청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학살당한 사람들의 최소 추정치는 80만 명이다.) 다른 비이슬람 소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 내 유대인 집단은 긴장하게 된다. 또한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로 악명이 높은 러시아가 연합군에 속하기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지지를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이를 이해한 독일이 유대인들의 협력을 받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독일 신문에서 유대인 국가를 지지하는 기사가 많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일부 대영제국의 정치가들은 이를 고려해  1915년부터 벨푸어선언 형태의 법안을 제안하곤 했다. 

 

T.E.로렌스(1888-1935)

 

고고학자였던 로렌스는  옥스포드 지저스 칼리지 재학 시절 졸업 논문을 위해 이미 시리아를 탐사했다. 이를 계기로 졸업 후 시리아 북부 탐사 팀으로 떠난다.(1911) 한편 영국정보국은 군사용 지도 제작에 고고학자들을 비밀리에 이용했다. 로렌스팀은 출애굽과정을 실증한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제국의 시나이반도 남부의 지도 제작을 개시한다.  1914년 2월에는 아카바 일대의 조사에 투입된다.  전쟁 발발 후 가을에 그는 민간인 신분의 지도제작자로 런던의 국방부 지형분석실로 출근한다. 여기서 그는 행정상의 문제로 갑자기 소위로 임관된다. 1914년 12월에 그는 카이로의 군사정보대로 배치받아  지도제작과 시리아전문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카이로에서 로렌스는 영사관 소속 로널드 스토스와 알게 된다. 로널드는 국방부장관의 심복으로 압둘라와 맥마흔-후세인 협상을 1914년 초부터 진행해왔다. 카이로 정보국도 1916.5월까지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몰랐다. 

 

스토스는 로렌스를  1915.10월에 헤자즈 아랍 반란군 지역에 로렌스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 데리고 간다. 거기서 로렌스는 단독으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륙으로 들어가서 후세인의 네째 아들인 반란군 사령관 파이잘을 만난다.  현지에서는 아랍 무슬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아라비아 반도 내륙으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자제했다. 종교적으로도 유럽인이 아라비아 반도 내륙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됐는데 영국은 해안가에서 무기나 금 등을 보급하는 정도로만 반란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아랍반란군 대신 군대 파병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는데, 프랑스는 처음부터 전후 아랍 반란군들이 시리아에서 지분을 요구할 것을 싫어했다. 아라비아반도 내륙에 유럽인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녀 온 로렌스는 프랑스파의 파병 주장을 반대하는 현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런던의 반프랑스파 정치인들과 장성들을 만족시키고 로렌스를 스타로 만든다.

 

1916.12월에 로렌스는 파이잘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어 다시 아라비아 반도로 간다. 1917.1월엔 파이잘이 아라비아반도 서해안 와즈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다. 영국은 함포 사격으로 지원하는 식이었다. 

 

로렌스에게는 다시 프랑스 외교전의 영향으로 와즈 북쪽의 아라비아반도 서해 최북단 아카바(aquaba)를 아랍인들에게 내주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졌지만 다름 아닌 로렌스의 지휘로 1917.7월에 아랍인들이 아카바를 점령한다. 이 작전으로 그는 대영제국의 영웅이 된다. 

 

이후 영국의 알렌비장군은 시나이반도 북부와 시리아 서쪽 라인을 이용해서 다마스커스로 진격하는데 로렌스와 파이잘이 앞서서 다마스커스를 먼저 점령한다. 알렌비장군은 1918.10.3 다마스커스에 입성하고 연합군은 10.31일 오스만제국과 종전을 선언한다. 

 

그 후의 흐름은 사이크스-피코 회담의 내용과 벨푸어선언의 혼합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가 개입해서 시리아의 파이잘을 쫓아내고 파이잘은 영국에 의해 이라크의 초대왕이 된다. 형인 압둘라는 요르단의 왕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영국령 인도가 밀었던 후세인의 경쟁자 이븐사우드가 차지한다. 이라크의 파이잘왕가는 파이잘이 죽은 1933년 후 끊임없는 구데타에 시달리다가 1958년 마지막 혈통이 군부에 의해 처형되고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로렌스는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종전 후 바로 군인을 그만두고 평생 아랍인들에 대한 미안함 속에 산다. 그는 영국왕의 작위 수여를 면전에서 거부하기까지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농간에 아랍인들이 이용당한 데에 자기가 깊이 일조했기 때문이라는 가책 때문이다. 파이잘 이라크 국왕이 런던에 올 때마다 그를 찾았지만 그는 파이잘을 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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