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린그라드]에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계몽주의가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영국 해군이 전함 돛대의 재목으로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목재를 썼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런 용도에 적합한 것은 무역의 중심지인 쾨니히스베르크로 들어오는 발트 해 연안 지방의 목재였다. 이것은 항구에 주둔한 강력한 영국 해군을 위해 쓰였고, 늘 그렇듯이 상업적인 용도로도 전용되었다."(「저먼 지니어스」, 피터 왓슨)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는데 칸트(1724-1804)의 가장 친한 친구 3명 중 한 명인 조지프 그린은 영국 상인이었다. 또다른 두 명은 조지프 그린의 동업자인 로버트 마더비, 시청 형사 테오도르 고트리프 히펠이었고 칸트는 이들과 농담하고 잡담하며 당구도 치며 보내는 시간을 즐겼다. 칸트는 40대 중반 정식 직업[대학교수]을 갖기 전 반백수 상태에서 당구로 부수입을 올릴 만큼 당구 실력이 좋았다. 특히 조지프 그린은 헐(Hull) 출신의 영국 상인으로 청어, 곡물, 석탄 등을 교역했는데 칸트의 자산 상담도 해주고 칸트와 흄, 루소 등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쾨니히스베르크에 틀어박힌 칸트에게 외부로의 창문이 되어 주었다. 스웨덴보리라는 신비주의자의 책을 읽은 칸트가 그 사람이 제정신인 사람인지 만나보고 오라고 부탁했을 땐 그 임무도 수행했다. '순수이성비판'(1781) 초고도 함께 윤독하기도 했다. 사실 칸트의 규칙성은 조지프 그린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86년 그린이 죽었을 때, 칸트는 매우 슬퍼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같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한 게오르크 하만의 집요한 노력과 중재로 출판되었는데 아무도 그 책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라트비아 수도인 리가에 있는 출판사에서 그 책이 나왔는데 이사야 벌린이 태어난 곳이 리가이다. 영국의 헐, 쾨니히스베르크, 리가 모두 옛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들이다.
이사야 벌린(1909-1997)은 당시 제정 러시아의 리가 출신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도 영국과 리가를 오가며 조지프 그린처럼 무역에 종사했다. "제정 러시아는 한자동맹의 무역 도시라는 리가의 옛 정체성을 굳이 바꾸려 하지 않았고 문화와 상업 수단의 언어로 독일어도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이사야 벌린」,마이클 이그나티에프) 1850년대 바그너가 리가의 오케스트라 단장을 지냈고 190년에는 브루노 발터가 지휘자로 일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리가의 성골은 러시아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독일계 토지 귀족들, 진골은 독일 무역상들, 그 아래로 유대인 상인들이 있었고 평민층은 게토의 유대인들과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라트비아인들이었다. 이사야 벌린처럼 영화 감독 에이젠슈타인도 리가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급 유대인들은 토지 소유, 김나지움 이나 대학 입학 등이 금지되었지만 이사야 벌린 집안 같은 상급 유대인들은 그런 법률이 적용되지 않았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금지된 톨스토이를 읽을 수도 있었다. 이사야 벌린의 아버지 멘델은 랍비의 손자였고 주요한 유대 하시디즘인 루바비치 교파의 직계 자손이었지만 멘델의 젊은 시절 정체성은 러시아적인 것이었고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멘델 벌린의 사업의 번창은 하시디즘 유대인 자본가 네트웍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이사야 벌린 자신은 그런 혈통에 대해 진저리를 치지만 20대 시절 옥스포드대학에서 동년배인 유대인 빅터 로스차일드의 학교(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까지 오갈 때 로스차일드의 경비행기를 이용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러한 집안 인맥이 작용한 듯하다.
1914년 7월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어를 사용하던 리가의 유대인들은 동쪽으로 이주하도록 소개명령을 받았지만 이사야 벌린의 집안은 그럴 필요는 없었다. 1915년 독일 제국이 발틱해 연안을 봉쇄하자 아버지 멘델의 주 교역 제품인 목재를 서유럽으로 보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는 304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삼림을 가지고 있었다. 벌린 집안은 페트로그라드로 이사를 한다.
1917년 2월 혁명 당시 벌린 가족은 임시정부에 열렬히 환호했지만 권력이 의회에서 볼셰비키로 이동했다. 이 시기에 멘델은 어떤 영국 상인의 목재 운송을 포워딩해주고 받은 막대한 수수료를 런던의 한 은행에 예치해 둔다. 그 후 볼셰비키는 거주민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했고 위원장은 보일러공이 맡았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벌린의 가족은 마당을 청소하는 일 등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스라엘 건국에 관한 벨푸어 선언에 대해서는 벌린 가족들은 시큰둥했다. 볼셰비키는 멘델을 그의 삼림을 감독하고 정부에 목재를 공급하는 공무원으로 임명한다. 덕분에 멘델은 통행의 자유, 수색-체포 면제권, 식료품 쿠폰, 권총 등을 받는다. 벌린 가족은 여전히 음악당에서 세자르 프랑크의 심포니를 들으며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페트로그라드 거주 위원회에서는 사정이 더 악화되서 석탄의 부족으로 벌린 전 가족의 거주공간이 방 두 개로 축소됐다. 식량 사정도 악화됐다. 하지만 멘델은 그러한 궁핍함은 견딜 수 있었지만 레닌 정부의 비밀경찰(체카)들의 거들먹거림과 외부와 단절된 듯한 사회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다. 당시 리가는 이제 독립 라트비아국의 수도였고 벌린 집안은 다시 고향인 리가로 이주를 한다. 이는 당시 볼세비키 정부도 용인한 정책이었다. 라트비아를 거친 후 벌린 집안은 런던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1921) 이미 런던의 은행에 예치해 둔 돈으로 멘델은 전성기 때의 사회적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가자마자 멘델의 아들인 이사야 벌린이 한 일은 런던의 입시 학원에 등록하는 일이었고 이사야는 명문고인 웨스트민스터에 가고 싶었지만 그건 학풍상 이사야 벌린이라는 이름을 로버트 벌린이나 제임스 벌린으로 바꿔야 가능했다. 결국 이사야는 유대인 쿼터제를 적용하지 않고 유대인 입학을 전면 허용하는 성공회 명문고인 세인트폴에 입학한다. 세인트폴에는 500명의 학생 중 70명 정도가 유대인이었는데, 성공회식 식사 기도 중에 입을 다문 채 있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사야 벌린은 주요 유대 명절은 지켰지만 유대교는 부인했고 종교적으로는 회의론자였다. 그는 옥스포드 명문 베이욜 칼리지에는 떨어지고 지금은 없어진 코퍼스크리스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대공황 전까지 옥스포드 대학에서는 일종의 반항의 표지로 동성애가 유행이었다. 대공황 이후에는 정치와 경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갑자기 모두 공산주의에 몰려갔다. 그의 학교엔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서 정치학은 '더 타임스'를 읽고 독후감을 쓰는 수준이었지만 아무튼 이사야는 옥스브리지판 고시삼관왕인 우등졸업과 특별연구원 자격을 취득하며 가업 승계의 부담에서 벗어나고 영국의 최상위 엘리트코스를 밟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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