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켈만의 획기적인 저서 '고대미술사'가 나온 1754년부터 슈뢰딩거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1933년까지 독일은 지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서구의 열등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올라서면서 프랑스나 영국, 네덜란드, 나아가 미국보다도 사상의 영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당시에 모든 국가는 국교제도를 채택했는데 프로이센은 17세기말부터 루터파의 신학 중심이 아닌 마음과 실천 위주의 국가경건주의를 채택하여 경건주의 목사들과 교수들이 국립대학인 할레대학 등을 장악하게 했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는 합리적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적 신학이 주류였으나 독일 지역은 달랐다. 1802년부터 프랑스대혁명의 경험으로 영국과 프랑스도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신앙의 흐름이 꺾이기 시작한다. 독일 지역의 경건주의는 영국의 체험중심의 감리교에 직접 영향을 주고 나폴레옹은 교황청과 화해한다.
독일 지역의 지식인들은 프랑스대혁명을 환영했으나 공포시대(1793-1794)를 지나며 기요틴 정치에 구역질을 느꼈고, 1806년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1814년까지 지배받게 되는데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고통스러운 자기 반성을 하고 개혁에 노력하게 된다.
괴팅겐 대학의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1752-1840)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 19세기 전반의 중요한 생물학자 중 절반을 가르쳤다. 그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수많은 실험 결과 생물에게는 형성 충동(Bildungstrieb)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제자인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는 물질이 여러 힘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성, 번식, 습성인데 이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을 만들기 때문에 국가는 유기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 교양(Bildung) 개념은 이상적인 국가를 향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바로 이 훔볼트가 1810년 개혁기에 프로이센 장관으로 베를린대학을 만든다. 철학부(교양학부)를 중시하고 공무원이 될 사람들에게 수준 높은 교양 교육을 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세미나 제도를 키웠는데 참여자들은 상당한 금액의 장려금을 받았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것은 공무원 승진에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교양학부 졸업자들은 인문계 중고등학교인 김나지움의 교사가 될 수 있다. 김나지움과 김나지움 졸업시험인 아비투어 제도를 만든 것도 훔볼트이다. 김나지움이 늘어나면서 수준 높은 교양에 맘놓고 몰두하는 중간계급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독일은 학술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논하는 낭만주의 헤겔파의 관념론은 프로이센 국가의 공식적인 철학이면서 셸링의 무의식 개념 등 심리학이나 생물학, 진화론 발전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는데 1830년대 이후엔 자연 과학의 발전이 작동되기 시작하여 실제로 화학이나 생물학 등이 곧 분화되자 1840년대부터는 인기가 없는 분야가 되고 만다. 1850년대가 되면 미국,영국에서 독일의 대학 제도를 배워가게 된다.
"빙켈만의 획기적인 저서 '고대미술사'가 나온 1754년부터 슈뢰딩거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1933년까지 독일은 지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서구의 열등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올라서면서 프랑스나 영국, 네덜란드, 나아가 미국보다도 사상의 영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문화와 지적인 측면으로 보면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프리드리히2세가 서거한 1786년까지 독일은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일어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필적할 만한 독일의 르네상스를 이뤘음을 증명했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제3차 르네상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독일적인 현상이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이신론(Deism)
16세기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 역학 분야에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는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져 있고 이 둘 사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등이 논의되었으며 이런 지식 체계를 바탕으로 451년 칼케돈회의에서 삼위일체설이 공인된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20세기에 와서야 교황청의 사면을 받았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붕괴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상계/지상계 이분법을 대체한 새로운 과학관에 맞춰 나름대로 삼위일체설을 각자 검토해봐야했다. 이 과정에서 삼위일체설에 대해서 소치니주의나 유니테리언들이 나온다. 아이작 뉴턴이나 제퍼슨 등은 여기에 속한다.
한편으론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고전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지리학적, 지질학적 발견 등이 성경에 적힌 것과 일치하지 않는 불편함에서 비롯됐다. 성경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6,000년 정도인데 이는 지질학의 발견과 달랐다.
성경해석에는 예전부터 '적응'이라는 개념이 있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성경 속의 어떤 본문들은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청중의 문화 상황에 적합한 언어와 심상을 이용한다. 칼뱅도 이런 본문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원래 청중의 지식 수준에 맞춘 '적응'된 표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이 부분은 천동설/지동설 논란과 관련하여 칼뱅이 내린 과학적 언급이다. 잉글랜드의 과학자 에드워드 라이트(1558-1615)는 칼뱅의 논지를 직접 적용하여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기도 했다. 또한 30년 전쟁(1618-1648)과 영국 내전부터 청교도 공화국, 명예혁명에 이르는 시기를 거치면서 (1641-1688) 종교적 관용에 대한 공감이 대두되고 그 지침이 되는 성경 해석의 장치로 존 로크는 에라스무스 최소(Erasmian minimum)를 주장했다.(1695) 멜랑히톤은 각 교파 간에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해석 차이를 아디아포라(adiaphora)로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전통은 1820-1830년대 슐러이어마허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작업을 '고등비평'이라고 했다.
이신론이 대두된 또다른 계기는 천연두 접종의 보급과 관계되어 있다. 볼테르에 의하면 종두법은 시르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시르카시아는 가난하지만 여인들이 아름다워서 오스만제국의 부유한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천연두가 퍼지면 커다란 재앙이 되므로 일찌기 종두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1714년 오스만제국 일부에서 시행하던 천연두 접종이 영국 왕립협회에 보고되고 유럽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는데 주로 종교인들이 이를 반대했다. 이교도들의 지역에서 넘어온 의학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신의 섭리나 예정설 등이 흔히 인용되는 이유라 그러한 해석상 비본질적 내용들은 약화될 필요가 있다는 에라스무스의 최소주의가 마땅히 적용되어야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볼테르같은 이 시기의 종두법 찬성론자들은 상당히 앞선 사람들이라는 것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볼테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이미 시행하고 있는 종두법을 사제들과 의사들의 반대로 1723년에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프랑스에 대해 한탄한다.
이신론은 특히 영국에서 많이 받아들여졌는데 존 로크같은 성공회교도뿐만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과 주교들도 받아들였다. 칼뱅주의자들 안에서 이신론은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볼테르 등을 매개로 프랑스에 들어간 이신론은 가톨릭과 크게 충돌한다.
경건주의(Pietism)
독일 지역 가톨릭 제후들과 개신교 제후들의 갈등으로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전인 30년 전쟁(1618-1648)의 여파로 1670년 경 루터파 독일 지역에서는 이성주의적, 신학적 접근이 아닌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다.(검토한 자료들 중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는데 1685년 낭트칙령철폐 후 2만 명의 위그노들이 프로이센 지역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도 성장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운동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에게 직접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프로이센은 경건주의자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1690년대에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크게 받은 경건주의 지식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은 할레 대학 신학부의 교수직에 임용된다. 그들은 국가의 역할을 경건주의의 목표 안에서 재정립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이들을 할레파 경건주의자들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재위 1713-1740)는 이들 할레 경건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했고 그 자신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 예를 들면 1729년에 프로이센의 루터파 목사들은 모두 할레 대학 신학부에서에서 최소 2년간 연수를 해야했다. 1723년엔 계몽주의자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가 할레대학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볼프는 계몽군주 프리드리히2세가 즉위하자 복권된다.(1740) 이런 분위기 속에 국가 경건주의 (State Pietism)을 형성했다. 경건주의 지식 기지는 칸트가 배출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도 설치된다. 프로이센 동북부 교회의 성격은 경건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1718년에는 100여 명의 경건파 목사들이 군목으로 임명되어 경건주의 신앙을 지도하고 병사의 가족들을 교육했다. 수백 개의 연대 단위 학교들이 설립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견진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교육 정책과 경건주위 정책은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때까지 이어진다.
새로운 대학들
1700년을 전후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대학들도 사제직을 위한 학위취득용 고시학원화되면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군주들은 새로운 대학을 설립한다. 프로이센의 할레대학(1694),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대학(1702), 하노버의 괴팅겐 대학(1713), 바이로이트의 에를랑겐 대학(1702). 하이델베르크대학도 쇄신에 들어간다. 괴팅겐 대학의 경우 전통적인 신학부의 검열권을 제한했다. 또한 신학부와 법학부로 가기 위한 교양과정에 불과했던 철학부를 강화하고 근대 언어, 문헌학,고고학,경험철학, 물리학, 응용수학 등의 과목을 신설했다. 비쎈샤프트라는 용어도 이때 괴팅겐대학에서 처음 만들어진다. 경건주의자 헤르만 프랑케는 할레대학에 '세미나'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중요한 혁신을 이루었다. 세미나 제도는 독창성을 요구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박사학위의 기준이 정립되어 공무원 승진에서 중요한 학위로 인정되었다. 여기서 교양(Bildung)이라는 개념이 성장한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으로 새로운 계층이 출현한다. 경건주의성직자-대학-공무원제도-군부가 뒤엉켜서 국비로 새로운 교양 계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역사주의, 생물학의 성립
1760년쯤 되자 지리학적 발견들과 정통 교리, 경건주의, 이신론,성경해석 사이에서 기독교 연대기와 관련한 역사학을 조정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18세기 괴팅겐 대학의 아헨발, 요한 슈테판 퓌터,아우구스트 폰 슐뢰처 등은 홉스와 자연법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가정, 시민단체, 국가의 기본틀로부터 역사가 발달해온 과정을 기술하는 방법을 확립한다.
1640년 데카르트는 기존의 영혼/육체의 이분법을 정신/물체의 이분법으로 다르게 나누었다. 영혼과 육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구분에서 오는 이름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영혼만이 실체적 형상이었다. 갈릴레이의 활동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느끼는 메르센(1588-1648) 등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 영향 하에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영향을 준다는 모델을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체계였다.
1690년 존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행동의 동기가 영혼에 작용하는 초월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경험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에서는 역사 발전 법칙과 존 로크의 맥락의 정신을 결합해서 역사발전을 정신의 힘의 성장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자리잡힌다.
존 로크의 '정신'에 매료된 할레 대학의 크리스티안 볼프의 수제자였던 알렉산더 바움가르텐(1714-1762)은 인간 정신의 창조성을 다룬 분야인 '미학'(1750-1758)을 만들었다. 괴팅겐 대학 출신의 이자크 이젤린(Isaak Iselin,1728-1782)은 1768년 그의 책에서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의 투쟁을 분석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적인 정치적인 외적 자유와 대조되는 내적 자유, 정신의 자유라는 독일적 자유 개념을 만든다. 정신에 대한 이런 접근법들을 역사주의라고 부르게 됐는데 전통적인 계몽주의의 영역인 자연 현상과 역사 현상이 다르다는 견해가 계속 반복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교양국가(Bildungsstaat)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주의적 접근은 또한 뉴턴이 애썼던 과학 혁명의 분야가 다루지 못하는 자연의 영역에 집중하는데 이는 장차 생물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은 이 분야에서서 계속 살아있었고 1859년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나오기 전까지 정향진화설을 이루었다. 괴팅겐 대학의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1752-1840)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 19세기 전반의 중요한 생물학자 중 절반을 가르쳤다. 그는 수많은 실험 결과 생물에게는 형성 충동(Bildungstrieb)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개념은 칸트와 셸링에게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특히 형성충동은 기계론적 수단과 언어로 이해할 수 없고 목적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말하자면 역사주의적 접근은 역사와 생물 영역에서 자신의 설명 방식의 적절한 대상을 발견했다.
또한 이런 풍토의 독일에서 진화론은 인기가 높았다.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는 블루멘바흐의 형성충동(Bildungstrieb)에 관심이 많았는데 물질이 여러 힘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성, 번식, 습성인데 이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을 만들기 때문에 국가는 유기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로써 원래 마르틴 루터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Bildung개념은 국가 안의 개인의 완성이라는 이상에 이바지하는 개념으로 세속화된다. 이로써 교양(Bildung)은 루터적 전통,경건주의,계몽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지식 활동과 개인 도덕의 지향점을 제시해주는 마법의 단어가 된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요하임 빙켈만(1767-1832)은 할레대학에서 공부했다. 고고학 발굴로 유명한데 '고대미술사'(1764)에서 한 예술 양식이 한 예술 양식으로 발전해간 과정을 진화의 단계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주의 작품의 한 획을 긋는다. 고대와 근대 사이에 역사적 차이가 있다는 그의 관점은 헤르더, 괴테,프리드리히 빌헬름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헤겔에게 영향을 준다. 또한 그리스적인 영원한 아름다움의 역사적 바탕이 된 침략당하고 쇠퇴한 그리스의 실제 아테네 역사는 독일인들의 그때까지의 힘겨운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이로써 그리스 정신은 교양의 구체적인 내용의 일부가 되었다.
괴테, 실러, 헤르더,프랑스 대혁명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는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1757-1828)의 친구였다. 카를 아우구스트는 어니스트 계열의 베틴 가문인데 원래 작센선제후직을 가졌다가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카를 5세에게 패하고 튀링겐 지역의 작센-바이마르공국을 받는다. 카를 5세와 같은 편인 알베르트계열의 베틴 가문은 승리의 결과 작센선제후령을 이어받았다. 알베르트 계열의 베틴 가문은 작센선제후 외에 1697년부터 1763년까지 폴란드왕을 겸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폴란드분할을 한 것 때문인지 나폴레옹에게 협력했다. 나폴레옹의 패전 후엔 폴란드뿐만 아니라 영토의 절반을 프로이센에 합병당한다. 카를 아우구스트는 세계적인 히트작인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저자인 괴테를 1775년 바이마르로 모셔온다. 나폴레옹도 이 책을 일곱 번 읽었다. 1776년 카를 아우구스트는 괴테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요한 장관직을 맡긴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1796)을 써서 교양소설로 알려진 독일 특유의 관념 소설의 전통을 연다.
헤르더(1744-1803)는 칸트에게서 배웠고 파리에서 디드로,달랑베르의 살롱에 드나들다가 그랜드투어 가정 교사를 하던 중 함부르크에서 카를 아우구스트와 괴테의 눈에 띄어 바이마르로 가서 죽을 때까지 바이마르 궁에서 일한다. 그는 국가를 루소식의 개인들과 군주의 계약 관계로 보지 않고 공동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자연적 실체로 보고 교양을 그 안의 시민 계급의 임무로 보았고 교양 시민 중에 천재가 탄생하도록 하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보았다. 또한 유전과 경험이 결합하여 시대정신(Zeitgeist)이 출현한다고 봤다.
군사학교 의학부 출신으로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논한 중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경력을 시작한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는 군도(1782), 간계와 사랑(1784), 돈 카를로스(1787) 등 희곡을 통해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주의와 자유의 한계를 비판했다.
프랑스대혁명 시대에 독일의 지식인 층은 혁명을 환영했으나 공포시대(1793-1794)를 거치며 구역질을 느꼈다. 1796년 당시는 역사학자였고 바이마르에서 작위를 받은 실러는 '발렌슈타인'(1799), '메리 스튜어트'(1800), '빌헬름 텔'(1804)을 발표하였는데 발렌슈타인은 당시의 나폴레옹을 빗댄 인물로 이성이 인간의 발전을 규정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독일관념론철학자들(1770-1840)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랐고 그가 나온 김나지움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부로 운영되는 학교였다. 그가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는 많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알고 있는 영국인들이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영국 군함의 목재가 여기에서 선적되었다. 칸트의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1859년 다윈의 진화론 이전에 이성과 기독교 신앙의 위치를 잡아주는 대표적인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토마지우스, 크리스티안 볼프, 모제스 멘델스 존 등 심리학을 태동시킨 철학 분야 흐름의 절정에 섰다. 이것은 아직 생물학이 없던 시대에 신이라는 존재의 개입 없이 인간을 설명하려는 경건주의자들의 노력의 흐름이었다. 이것이 바로 1770년대에서 1840년대까지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바이마르, 예나에서 관념론철학자들이 탄생한 배경이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칸트, 헤르더, 피히테가 나왔고 피히테, 헤르더는 바이마르에서 활동한다. 예나대학에선 라인홀트를 이어 피히테, 셸링, 헤겔이 관념론을 발전시키며 실러, 횔덜린, 노발리스,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보조를 맞춘다. 그 뒤를 이어 슐라이어마허, 아우구스트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 빌헬름 폰 훔볼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이 활동하는데 후기엔 대체로 1810년에 설립된 베를린대학에 모이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관념론은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패배(1806) 이후 보수적,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프로이센의 반성적 근대화의 배경이 된다. 독일 관념론은 'Deutscher Idealismus'의 번역어인데 여기서 'idea'는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를 뜻한다. 이를 '실체'로 번역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1790)에서 자연의 목적은 인간 본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파악은 과학적이지 않고 미학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낭만파 운동이 결집하는 계기가 된다. 예술은 그 자체에서 목적이 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는 확장된다.
작센 출신의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4-1814)는 심리학 출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트에게서 배우고 예나대학에서 가르쳤다. 피히테는 자유를 자아와 비아(not-self)의 사이의 관계로 파악한다. 칸트의 내면의 자유는 다른 자아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한계까지의 자유가 된다. 국가는 다양한 시민이 서로 배려하도록 각각의 주관적 관점을 억누르는 것으로 비슷한 시기의 제레미 벤덤과 비슷한 말이다. 1810년에 초대 베를린대학 총장이 된다. 이즈음 그는 국민민족주의를 만들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의 프랑스에 대한 패배 직후 나온 공동체적 고통은 이런 식으로 거대한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태동시킨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그의 저서 '종합지식학의 토대'는 16회나 찍었는데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
헤겔(1770-1831)은 튀빙겐대학의 신학부 학생이었으며 칸트와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역사가 최고로 발전하면 더 이상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없는 절대지 상태의 사회제도를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1830년대 이후 이 테제를 발전시킨 청년헤겔파가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 등이 있다.
헤겔의 후임인 프리드리히 셸링(1775-1854)은 이러한 심리학의 태동 과정에서 처음으로 무의식을 언급했다. 세계는 총체적인 무의식에서 자의식 단계로 변하는 현상이다. 피히테의 의지와 셸링의 무의식은 낭만파 운동의 미학적 중추를 형성한다. 셸링은 자연의 끝없는 생산성을 무한한 진화로 여겼는데 독일 낭만주의는 다윈 이전에 진화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또한 셸링은 사물의 체계에 대한 역학 법칙, 생물들의 진화법칙,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체계를 언급하며 오늘날의 창발적 진화를 말하려 했다.
나폴레옹시대의 자극
1806년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1814년까지 지배받게 되는데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자기 반성을 하고 개혁에 노력하게 된다. 국가가 유기체라는 생각에 도달한 블루멘바흐의 제자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가 이때 장관직에 취임한다. 그는 대학입학시험인 아비투어제도를 만들고, 김나지움이라는 학교 시스템을 거친 학생들만 이 시험에 응할 수 있게 했으며, 1810년 교양학부인 철학부가 전문학부인 신학부, 법학부보다 우위에 있는 베를린대학을 만들어 철학부졸업자들이 김나지움의 선생님으로 취업할 수 있는 선순환시스템을 만든다. 이때 그는 인문학부를 자연학부보다 우위에 뒀다. 이 모든 개혁은 몇 달만에 이루어진 것이고 곧 그는 장관직을 그만뒀다.
1810년에 피히테, 슐라이어마허,사비니가 베를린으로 왔다. 초기에는 문헌학과 역사학 중심의 철학부(교양학부)의 혁신이 있었다. 이 때도 지배적인 사고는 낭만주의였다. 1830년대 이후엔 과학 분야가 세계 최고 분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과학 분야의 졸업생은 1860년대 이후엔 교직 말고도 산업계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프로이센에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세미나 제도도 발전해서 우수 보고서에는 꽤많은 상금도 주었다. 과학전공자들은 베를린 대학을 장악한 헤겔주의자들, 낭만파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 순수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방어를 이끌어냈다. 순수과학도 정신을 단련하고 개인의 교양을 발전시키므로 빵을 위한 학문(Bread Study)은 아니다. '빵을 위한 학문'이라는 신학,법학,의학 등 전문과정에 대한 비판적 단어는 이때 생겼다. 화학과 생명과학이 철학부(교양학부)의 필수 과목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디리클레, 헬름홀츠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C.G.J 야코비(1804-1851)는 베를린 대학에 입학해서 문헌학에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835년 그는 수리물리학 세미나를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개설하고 모든 참여자에게 20탈러(2,000달러)를 지급했다. 물리학세미나는 이어 할레대학(1839), 베를린대학(1864)에도 등장한다. 야코비와 디리클레 밑에서 리만(1826-1866)이 연구하고 괴팅겐으로 돌아갔다. 1854년 그는 리만기하학을 발표한다.
펠릭스 클라인(1849-1925)은 본대학 출신으로 뮌헨대학에서 막스 플랑크를 가르치고 1886년부터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괴팅겐 대학을 세계 최고의 수학센터로 만들었다. 19세기 무렵에는 프랑스의 폴리테크닉을 중심으로 라그랑즈, 몽주 등이 수학을 주도했지만 독일이 이 무렵 이 흐름을 이어받아 히틀러 시대까지 이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을 듣고 바울로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사도행전 17:32)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중요 종교가 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화가 의식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바울의 아레오파고 법정 설교에서도 드러난다. (사도행전 17:16-) 여기서는 사도행전 2:14절에 나타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베드로의 역사적 설명과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베드로식 설교는 아테네인들에게 공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우리가 우주공간에서 친구를 툭 밀면 그 친구가 등속 운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우리로부터 멀어져 가는 모습을 상상하듯이 당시 지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달 위쪽의 천상계와 달 아랫쪽의 지상계를 철저하게 구별했다. 천상계는 완전하고 제5원소로 이루어졌으며 별들은 규칙적인 원운동을 한다. 지상계는 물,불,흙,공기로 이루어져 있고 불규칙하며 불완전하고 낙하운동처럼 직선운동을 한다. 이 세계관은 16세기까지 지속됐다.
당시의 과학 기술에 의하면, 죽은 자가 부활하는 것처럼 천상계에서 지상계로 다시 온다고 쳤을 때 사고틀의 붕괴가 일어났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이를 변호하기 위해 부활한 몸은 천상계의 완전한 형태인 구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아마도 아레오파고에서 바울로를 비웃었을 그 아테네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완전한 하느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는 주장도 이론 구성이 힘들었다. 발렌티누스는 "예수가 먹었던 음식은 그의 몸 안에서 부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혀 부패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270-336)는 성자를 결국 지상계의 제1의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했다. 이런 문제는 그러니까 전적으로 당시의 상식과 지식 수준과의 조화의 문제이다. 오늘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역사적 유물이라는 해결책이 있지만 갈릴레오가 나올 때까지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초대 교회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는 성경 본문의 내용 그대로 325년 니케아회의에서 기각되고 니케아신경에 정확히 그 사실이 표현되지만 그 후에도 천상계와 지상계 간의 논쟁은 지속된다.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들은 아리우스를 지지했는데 테오도시우스황제(379-395재위)가 그들을 모두 쫓아낸다. 마지막으로 칼케돈회의(451년)에서 재확인이 이루어지는데 그 후에도 알렉산드리아 중심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더 강조하는 단성론이 대두되기도 한다.
이런 논쟁은 사실 전쟁이었는데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 쟁점의 힌트를 주는 책은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기독교의 역사'(2013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