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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역사

니얼 퍼거슨,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 /2011(2011), 21세기북스

2021. 4. 29.

"이 책의 목적은 부, 영향력,힘 측면에서 서양의 문명을 그토록 확대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은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와 함께 만들어진 책이다. 서론에서 위의 인용문에 대한 대답을 검토한다.

 

  • 지식,기술인가? : 16세기에는 그러지 않았다.
  • 문화적차이인가?(막스 베버의 주장)  : 개인주의, 휴머니즘, 신교도윤리 등. 재정적 매개체와 훌륭한 정부가 뒤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David S. Landes,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 1995)
  • 결국은 제도 : 문화가 같은 두 집단 비교 실험을 마침. 남한과 북한, 동독과 서독 등

그래서 퍼거슨은 제도와 관련된 여섯 가지 개념으로 답한다. 이는 물론 티브이 시리즈 목차를 위한 것일  뿐이다. : 경쟁, 과학, 재산권, 의학, 소비 사회, 직업윤리. 예를 들어 유럽이 아프리카를 유린한 것은 단지 맥심기관총 때문만은 아니고 열대병 예방 백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등등. 

 

경쟁은 근대 민족 국가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만들었다. 과학은 일단 서양에 군사적 강점을 제공했다. 재산권은 가장 안정적인 대의제의 기반을 형성했다. 의학은 장기적으로 식민지인들의 평균 수명 역시 획기적으로 높였다. 소비는 산업 혁명을 유지시켰다. 구소련권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것을 시도했지만 결국 소비와 관련이 없어 붕괴한다. 직업윤리는 다른 모든 요소로부터 오는 불안과 사회 역학을 고정하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얼개와 구체적인 논거들은 좀 성긴 편인데 이 책이 원래 티브이 시리즈에 기반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들이나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수한 서양인들은 앞으로도 잘해야겠다.  우리 이런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것 같다. 특히 뒷부분을 보면 서유럽이 이끌었던 이 한덩어리의 발전은 로마제국이나 오스만제국의 갑작스런 몰락 등을 볼 때 한 세대가 걸리지 않는 점, 중국의 부상이 의미하는 바 등을 진정 걱정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메시지가 곳곳에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심 표현을 조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야심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네갈에서 식민 통치는 서른 살에서 마흔 살로 10년 정도 수명 연장이라는 효과를 수반했다."

뭐 이런 진부한 우월주의적 표현들이 종종 나오더라도 책을 덮거나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서 나는 몇 가지를 새롭게 배웠다. 

 

1. 존 로크와 루소의 차이

 

존 로크의 정치이론의 핵심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대표를 뽑고, 대표들의 동의가 있어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재산권의 보호였다. 캐롤라이나를 하사받은 귀족들 중 하나인 샤프츠베리의 후원을 받던 로크는 1669년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을 만들었는데, 이 틀이 구현되었고 신대륙 토지 분배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이를 대부분 반영했는데 독창적인 것은 루소의 '일반 의지'이다. (인권선언 6항 -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일반의지는 다름 아니라 전통적인 유럽의 세습 왕가를 대치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1793년 10월 자코뱅파의 처형, 1794년 4월 당통의 추종자들의 처형, 로베스 피에르의 처형 등으로 돌고 돌다가 쿠데타로, 총재 정부로, 나폴레옹 황제로 일단 귀결된다. 

 

2. 우생학과 분리주의

 

"100년 전만해도 인종차별은 시대를 역행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 이론을 열렬히 받아들이듯 당시 과학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몹시 환영했다."

 

20세기 처음 10년간 독일은 과학 발전의 최전선이었다. 여기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면역력이 높은 미래의 인류-초인을 만들기 위한 우생학이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인도주의에 대해 인종 차별이 합리화됐고 식민지 관리들의 다양한 행동에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었다.

 

또한 북아메리카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와서 원주민들이나 노예들과 자연스럽게 분리가 됐지만  남아메리카의 이민자들은 16세기부터 남자만 오는 경우가 많아서 크리올,메스티조,뮬라토 등의 혼혈 카스트 제도가 발달된다. 남미의 가난은 혼혈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은 1968년 분리주의를 호소한 조지 월리스가 미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절정에 달했다. 1967년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주가 16개나 되었다. 이는 이를 금지하는 대법원 판결이 난 뒤였지만 테네시주는 1978년까지, 미시시피주는 1987년 12월까지 법을 폐기하지 않고 버텼다. 

 

 3. 오스트리아-헝거리 2원제국

 

오랫동안 이해가 안갔던 이 체제는 잉글랜드제국-스코틀랜드 관계를 카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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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왜 세계는 서양 문명에 지배받았는가?600년간의 세계사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되짚어가며, 서양 문명의 비밀을 밝혀내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 『시빌라이제이션』은 출간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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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앤더슨, 「아라비아의 로렌스 」(2013)/정태영 옮김(2017, 글항아리)

2021.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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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의 로렌스

지난 백 년간 중동에 불어닥친 흉폭한 역사!한 줌의 모험가와 새파란 장교들이 판치고 다녔던 사막의 무대에서 로렌스의 어두운 면과 심각한 결점을 세밀하게 재건하는 저자는 현대 중동이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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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황제 빌헬름2세와  대영제국은 1914년 9월 정도에 본격적인 제1차대전에 돌입한 후에 모두 지하드(이슬람의 무장 투쟁)와 시오니즘을 두고 경쟁했다.

 

1차 대전이 시작하고 한참 뒤인 1914년 11월에 오스만제국은 독일과 동맹을 결정했다. 시리아의 오스만 총독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 메디나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 서안을 아우르는 헤자즈지역의 후세인 족장(샤리프)에게 협조를 요청하고 대신 전후 독립을 약속한다. 오스만제국의 서쪽 변방인 이곳은 영국령 수에즈운하 및 홍해와 맞닿아 있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영국도 그 이전부터 후세인과 접촉을 갖고있었다. 영국은 협력의 댓가로 전후 지금의 아라비아반도와 시리아,이라크,요르단,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지역에 아랍 국가 설립을 승인해 줄 것임을 후세인에게 약속한다. (맥마흔-후세인 협정 1916.5) 후세인은 1916.6월 경에 아랍 반란을 일으킨다. 후세인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오스만제국을 지배하는 청년 투르크당의 근대화 정책 등과 갈등을 일으키던 참이었다. 

 

그런데 영국은 똑같은 시기에 프랑스와 전후 시리아를 프랑스가 차지하고 이라크를 영국이 차지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16세기 이래 오스만 제국에 있는 시리아 땅의 가톨릭 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사이크스-피코 협정) 게다가 1917. 11월엔 영국이 벨푸어선언을 하는데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을 승인하는 내용이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은 후세인을 영국 앞잡이 내지는 영국에 놀아난 인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후세인은 이런 불리한 입지에서 아랍 반란을 지도해 나가게 된다. 세 협정의 영국 상대방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른 협정의 내용을 공식적으로는 모르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공동체를 재건하겠다는 유대인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 내 팔레스타인의 땅을 조금씩 사들이는 형태로 움직였다. 그것을 반대하는 유대인 공동체도 많았다. 그러한 움직임이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지역공동체와 민주주의 시스템으로부터 고립시킨다는 우려에서였다. 그런데,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협력을 맺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와 싸우는 과정에서 제국 내에서 러시아와 친화적인 아르메니아인들 150만 명을 이런저런 이유와 사정으로 인종청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학살당한 사람들의 최소 추정치는 80만 명이다.) 다른 비이슬람 소수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 내 유대인 집단은 긴장하게 된다. 또한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로 악명이 높은 러시아가 연합군에 속하기 때문에 연합군에 대한 지지를 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이를 이해한 독일이 유대인들의 협력을 받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독일 신문에서 유대인 국가를 지지하는 기사가 많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일부 대영제국의 정치가들은 이를 고려해  1915년부터 벨푸어선언 형태의 법안을 제안하곤 했다. 

 

T.E.로렌스(1888-1935)

 

고고학자였던 로렌스는  옥스포드 지저스 칼리지 재학 시절 졸업 논문을 위해 이미 시리아를 탐사했다. 이를 계기로 졸업 후 시리아 북부 탐사 팀으로 떠난다.(1911) 한편 영국정보국은 군사용 지도 제작에 고고학자들을 비밀리에 이용했다. 로렌스팀은 출애굽과정을 실증한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제국의 시나이반도 남부의 지도 제작을 개시한다.  1914년 2월에는 아카바 일대의 조사에 투입된다.  전쟁 발발 후 가을에 그는 민간인 신분의 지도제작자로 런던의 국방부 지형분석실로 출근한다. 여기서 그는 행정상의 문제로 갑자기 소위로 임관된다. 1914년 12월에 그는 카이로의 군사정보대로 배치받아  지도제작과 시리아전문요원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카이로에서 로렌스는 영사관 소속 로널드 스토스와 알게 된다. 로널드는 국방부장관의 심복으로 압둘라와 맥마흔-후세인 협상을 1914년 초부터 진행해왔다. 카이로 정보국도 1916.5월까지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몰랐다. 

 

스토스는 로렌스를  1915.10월에 헤자즈 아랍 반란군 지역에 로렌스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 데리고 간다. 거기서 로렌스는 단독으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륙으로 들어가서 후세인의 네째 아들인 반란군 사령관 파이잘을 만난다.  현지에서는 아랍 무슬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아라비아 반도 내륙으로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자제했다. 종교적으로도 유럽인이 아라비아 반도 내륙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됐는데 영국은 해안가에서 무기나 금 등을 보급하는 정도로만 반란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아랍반란군 대신 군대 파병을 통한 해결을 주장했는데, 프랑스는 처음부터 전후 아랍 반란군들이 시리아에서 지분을 요구할 것을 싫어했다. 아라비아반도 내륙에 유럽인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다녀 온 로렌스는 프랑스파의 파병 주장을 반대하는 현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런던의 반프랑스파 정치인들과 장성들을 만족시키고 로렌스를 스타로 만든다.

 

1916.12월에 로렌스는 파이잘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어 다시 아라비아 반도로 간다. 1917.1월엔 파이잘이 아라비아반도 서해안 와즈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운다. 영국은 함포 사격으로 지원하는 식이었다. 

 

로렌스에게는 다시 프랑스 외교전의 영향으로 와즈 북쪽의 아라비아반도 서해 최북단 아카바(aquaba)를 아랍인들에게 내주지 말라는 지령이 떨어졌지만 다름 아닌 로렌스의 지휘로 1917.7월에 아랍인들이 아카바를 점령한다. 이 작전으로 그는 대영제국의 영웅이 된다. 

 

이후 영국의 알렌비장군은 시나이반도 북부와 시리아 서쪽 라인을 이용해서 다마스커스로 진격하는데 로렌스와 파이잘이 앞서서 다마스커스를 먼저 점령한다. 알렌비장군은 1918.10.3 다마스커스에 입성하고 연합군은 10.31일 오스만제국과 종전을 선언한다. 

 

그 후의 흐름은 사이크스-피코 회담의 내용과 벨푸어선언의 혼합으로 진행되었다. 프랑스가 개입해서 시리아의 파이잘을 쫓아내고 파이잘은 영국에 의해 이라크의 초대왕이 된다. 형인 압둘라는 요르단의 왕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영국령 인도가 밀었던 후세인의 경쟁자 이븐사우드가 차지한다. 이라크의 파이잘왕가는 파이잘이 죽은 1933년 후 끊임없는 구데타에 시달리다가 1958년 마지막 혈통이 군부에 의해 처형되고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로렌스는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종전 후 바로 군인을 그만두고 평생 아랍인들에 대한 미안함 속에 산다. 그는 영국왕의 작위 수여를 면전에서 거부하기까지 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농간에 아랍인들이 이용당한 데에 자기가 깊이 일조했기 때문이라는 가책 때문이다. 파이잘 이라크 국왕이 런던에 올 때마다 그를 찾았지만 그는 파이잘을 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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