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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지/역사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파.

2021. 6. 23.

"기독교인들이 교회 일치를 주장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비정통적 교리(이단)들이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유발하여 기독교 자체가 로마 정부로부터 감시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2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기독교인들을 조직적으로 박해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 초기 순교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나중에 이단으로 분류하게 된 부류의 기독교인들이었다."(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으로 지금의 튀니스인 카르타고에서 공부했다. 카르타고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버금가는 로마의 도시였다. 383년부터 로마나 서유럽의 중심 도시 밀라노에 있었던 그는 밀라노에서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  395년부터 고향 근처 히포의 주교로 나머지 일생을 보낸다. 참고로 313년에 로마제국에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이제 로마 제국의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의 최고 주교임을 선언한다는 뜻이다. 376년 경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395년엔 동서로마가 분리되었다. 429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카르타고 지역은 반달족에 의해 폐허가 된다.  

 

카르타고 지역 출신 중에는 테르툴리아누스(160-220)가 있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중죄를 지은 자를 교회가 용서해 주는 당시 새롭게 창작된 고해성사라는 제도를 부정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였다. 그 밖에도 만인사제주의, 여성성직 등을 주장했는데 이는 이미 카타콤 시절부터 성장해온 성직자의 특권적 지위를 문제삼은 것이다. 이 때가 313년 이전인 것을 생각해 봐야한다. 250년 경 로마시의 교회는 주교와 46명의 사제 등이 있었으며 이미 부유했고 많은 자선 활동을 벌이고 있었고 또한 이미 부패한 상태였다. 313년 이후라고 나아진 것은 없는데 366년엔 로마의 주교직을 놓고 전쟁이 터져서 137명이 죽었다. 히에로니무스 등의 교부들은 성경에 비추어 이런 현상들을 한탄했는데 그 당시에 성경의 기준은 너무 이상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성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세례를 받고 8일만에 주교가 되던 시대였다. 암브로시우스의 아버지는 갈리아 지역 통치자로 로마의 6대 귀족 중 한 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테오도시우스황제를 파문할 힘도 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평신도에서 바로 주교로 임명됐다. 문제점에 대한 끊임없는 국가 차원의 입법이 시도됐지만 그 이후 천년 정도가 한참 지나도 사정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250년부터 로마제국은 기독교도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에 들어간다. 그 전까지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가 있었다면 국지적인 납세 거부 소요 등 일상적인 것뿐이었다.  이 시기에 불법이지만 공공연히 귀족층에 침투된 광범위한 교회는 보편성을 강조하게 길들여지고 마카베오적인 민족주의, 반제국주의 해방자 예수는 탈색되어간다. 

 

313년이 되자 죽은 자와 산자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로마제국의 박해 기간 살아남은 자들은 일봉의 변절자들이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향 고대 카르타고 지역은 로마제국 내에서도 반골성향이 강했고 카르타고 교회는 저항의 온상지였고 보다 유대교에 가까운 기독교였고 공식적인 박해 기간동안 엄청난 박해를 받고 살아남았다. 311년에 카르타고 교회는 주교로 부임한 케킬리아누스를 거부했는데 박해 시절 성경책을 불태우도록 용인한 자(이런 자들을 트라디토레스 traditores라고 불렀다.)가 그를 안수했기 때문이다. 대신 카르타고의 80여 명의 주교들은 도나투스를 카르타고 주교로 임명한다. 이들을 도나투스파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고민 끝에 케킬리아누스를 지지한다. 도나투스파에도 배교했던 경력이 있었던 주교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반제국주의운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로마 지지층의 부유층보다 가난한 원주민들을 지지세력으로 업고 있었다. 347년에 케킬리아누스의 요청으로 도나투스파를 제압하기 위한 군대가 들어왔지만 많은 순교자를 낳고 이 사건 이후 도나투스파는 더욱 성장한다. 그러자 로마는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지정한다. 이 사건은 로마 제국과 보편적 공교회의 제휴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도나투스파는 500명이 넘는 주교를 거느린 교회 조직이었고 전례나 가르침은 정통파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은 순찰대를 구성해 대토지소유자, 제국주의자인 케킬리아누스잔당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이 지역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도나투스파를 '버림받은 사람들의 미친 무리'라고 비난했다. 도나투스파는 히포의 정부 제빵 공장을 운영하는 등 세력이 강했다.  411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로마제국과의 협상 과정에 300명의 주교를 동원할 정도로 막강했다. 히포의 주교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을 다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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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 YES24

역사가가 보여주는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로마제국 변방,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지 살펴본다. 또한 서양문명의 설립과 역사 발전에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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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볼테르/니콜러스 크롱크 (2017)

2021. 5. 18.

볼테르(1694-1791)는 이미 20대 때부터 성공한 파리의 극작가 겸 배우였다. 파리의 극장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헐리웃의 방송국이고 넷플릭스, 디즈니이고 볼테르는 오늘날의 어벤저스 시리즈의 감독이고 작가이며 때때론 배우인 셈이다. 그는 평생 살롱에서 인기있는 사람이었고 최초의 셀레브리티였다. 그는 평생을 궁정인으로 살았는데 베르사유궁전의 왕의 비서직을 샀으며 (당시는 고위공무원직을 매매했다.) 늙어서도 미래의 루이 18세와 그 약혼녀를 위해 연극을 기획하고 바치기도 한 어용시인이었다. 최초의 브로마이드가 제작된 스타였으며 그의 집은, 당시 유럽의 상류층 자제들이 2-3년간 프랑스-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공부하는 관행인 그랜드 투어의 주요한 포인트였다. 역사상 최초의 행동하는 지식인은 말하자면 대학 교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정치연예인, 폴리테이너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는 이신론자였다. 당시 이신론과 무신론의 구별은 별 의미없다. 이신론은 신이 우주를 만들고 개입하지 않는다는 자연종교적 입장인데 주로 가톨릭측으로부터 무신론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볼테르는 프랑스인이라 국가의 지배 종교인 가톨릭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이신론자들은 아무 이유없이 등장한 것이 아닌데, 천연두 예방 접종을 엉뚱하게 예정설(칼뱅주의)이나 가톨릭 사제들이 신의 기적과 섭리를 들어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이다. 볼테르는 프랑스사람임에도 영국의 경험론자 로크와 뉴턴을 대륙에 전파하는데 힘을 썼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이신론의 방법적 기초인 루크레티우스의 에피쿠로스주의와 원자론의 영국 버전인 조지 무어의 '절대 공간= 신의 감각 기관'설을 받아들였다. 헨리 모어(H.More)의 프랑스 버전은 가상디인데 볼테르가 가장 좋아하는 지적 선배이다. 에피쿠로스주의는 흔히 유물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상디와 헨리 무어가, 아이작 뉴턴이 그 예이다. 아이작 뉴턴은 비공개적으로 유일신론자였지만 청교도에 속했고 연구의 가장 많은 시간을 신학에 할애했다.

감동적인 부분은 그의 인생 마지막 부분인 1760년대에 있다. 그는 재판에서 희생된 어이 없는 희생자들을 위해서 펜을 들었다. 그의 유명세에, 감춰진 가톨릭재판은 지성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판결이 취소되는 사태가 여럿 발생했다.칼라스라는 개신교도를 툴루즈법원의 가톨릭판사들이 종교적 편견에 이끌려서 사형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자 그는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하고 집필을 해서 그 사건이 결국 뒤집히는데 일조를 함으로써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인물상을 만들었다. 시르방이라는 사람은, 이번에도 툴루즈법원인데, 볼테르의 운동 덕분에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랄리 백작 사건, 말라그리다 사건 등 그가 개입해서 뒤집힌 사건은 많았는데, 볼테르에게 찍히면 그 법관이나 관계자는 공공의 적이 되고 나쁜 여론에 시달리게 된다. 소송은 오래 걸렸고 볼테르는 글자 그대로 마지막 숨을 내쉴 때조차 그 일을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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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볼테르

“‘인간 볼테르’에 대한 권위 있으면서도 간단명료한 책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관용론』의 저자로 유명한 볼테르는 유럽 계몽주의 시대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볼테르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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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역학의 사회경제적 근원

이 책은 뉴턴역학에 대해 배우려는 대학생이나 전문가 및 실무자를 위한 책으로 뉴턴역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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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퍼거슨, 제국(민음사 2006/와일리 2003)

2021. 5. 8.

 "영국인들은 독, 일본, 이탈리아인들이 그들의 제국을 유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제국을 바쳤다. 그것만으로도 영제국이 저지른 다른 모든 죄악을 씻지 않았을까?"(닐 퍼거슨)

 

서인도와 동인도 - 제국의 노른자

대영제국의 식민지 개척은 대체로 16세기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중남미에서 막대한 금은광을 개척한 스페인제국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영국은 스페인제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아일랜드를 식민화했다. 금을 찾아 서인도제도와 인도로 갔다. 중남미 중심지는 스페인과 경쟁할 처지가 안되었기 때문에 주변부에 영역 표시를 하고 다녔다. 서인도제도는 사망률이 높았고 금도 없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17,18세기에 서인도제도의 설탕과 동인도(지금의 인도)의 차, 실크, 캘리코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영국은 이들 제품을 수입해서 북유럽에 재수출하며 성장했다. 뉴잉글랜드와 같은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이 지역은 이미 뉴펀들랜드지역의 대구 어장을 위해 오래 전부터 어부들의 집단거주지가 있었다. 막대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서인도제도를 위해 농산물을 제공하는 기지 정도의 의미밖엔 없었다. 뉴잉글랜드, 펜실베니아, 캐나다, 호주 등은 또한 가난한 영국인들과 비국교파 이민자들을 위한 정착지로서의 역할 정도를 했다. 

 

동인도는 처음에 변방국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적인 제국인 무굴 제국 황제의 허락을 받아 소규모 무역을 하는 정도였다. 18세기 중반 무굴제국 내부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내분에 깊이 개입한다. 영국측과 프랑스측은 이미 이와 비슷한 역학 구도를 가진 지역에 같은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었으므로 7년 전쟁이 터진다.(1756-1763) 이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인도에서 퇴출당한다. 영국과 무굴제국의 파트너는 승리했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756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벵골, 비하르,오리사의 2,000만 인도인들에 대한 디와니(세금징수권)를 인수함으로써 본격적인 인도의 정치적 통치 단계에 돌입한다. 1805년엔 무굴 황제가 영국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1815년에 영국의 통치 하에 있는 인도인들은 4,000만 명이었다. 

 

기독교 문화제국주의의 실패 - 세포이항쟁(1857)

서인도제도의 노동 조건이 열악하고 사망률이 높아서 영국은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체 노예 무역의 30%를 영국이 담당했다. 1662년부터 1807년까지 영국배를 타고 250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신대륙으로 왔다. 런던의 클래펌 지역의 홀리 트리니티 교회 복음주의자들이 노예반대운동을 확산시켰다.노예 무역 폐지에 앞장선 사람들은 존 뉴턴, 에드먼드 버크, 시인 콜리지, 웨지우드 등이 있었다. 그 전에 퀘이커들의 주장으로 펜실베니아에서는 이미 1780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이 즈음에도 노예 무역은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이었다. 1807년 대영제국에서 노예 무역이 폐지되었다

 

클래펌의 열기는 인도에까지 미쳤다.  1813년 새로운 동인도법은 인도에 주교 한 명과 부주교 세 명을 임명하도록 했다.  인도 전통 종교의 사티제도 등에 대한 문명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1813년부터 1825년까지 벵골에서만 7941명의 여성이 사티관습으로 사망했다. 인도의 영국군의 80%가 세포이라는 인도의 군인 카스트들이다. 이들은 무굴제국 말기의 내전 시기부터 영국인들과 함께 긴밀하게  싸워왔다. 결과적으로 영국인들의 문화 정책 변화에 세포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1857년 영국은 반란군들에게 응징한다. 런던에서 찰스 스퍼전 등과 복음주의자들이 응징론에 열변을 토한 후였다.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 일로 쇼크를 받은 빅토리아 여왕은 각성을 했고 1858년 인도의 문화에 대한 영국의 불개입을 선언하고 동인도회사는 청산된다. 

 

제국의 반제국주의

유대인인 로스차일드의 금전 지원을 받는 세실 로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금광과 다이아몬드광산을 지키기 위해 백인 원주민들을 상대로 보어 전쟁(1899-1902)을 치른다. 이들을 지원하는 런던의 체임벌린 정부는 네델란드계 백인인 보어인들을 상대로 영국판 베트남전쟁을 벌였다. 보어인들이 게릴라전으로 전환하자 영국인들은 그 가족의 3만 가구를 불태워버리고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수용소에 몰아 넣었다. 총 27,927명이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병으로 죽었다. 대부분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 사태에 대한 런던의 충격과 반발이 1900년대 영국 정치의 자유당에 힘을 실어 준다. 영국 납세자들이 돈을 대고 군인들이 싸웠지만 결국은 세실 로스와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광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대두된다. 이 시기에 제국 중심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이르는 광범위한 비판이 대부분 완성되었다. 홉슨의 제국주의론도 이때 출판된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야만적 행태는 그 때 형성된 담론의 경험을 훨씬 뛰어넘는다. 

 

20세기 초반에도 제국주의국가들의 잔인한 행태가 이어졌다. 독일의 트로타장군은 나미비아의 헤레로족을 1904년부터 3년간 8만 명에서 2만 명으로 감소시킨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 벨기에의 레오폴트 2세는 고무를 위해서 콩고인 1,000만 명을 희생시켰다. 프랑스인들도 콩고의 프랑스령에서 벨기에보다 더 낫게 행동한 것은 아니다. 조선에서는 평화 시위에 대해 1919년 일본이 6,000명을 살해했다. 영국은 1차 대전 중 독립 약속 이행을 서두르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인도의 비폭력시위대에게 발포하여 379명이 사망했다. 사마르칸트와 세미레치의 이슬람교도의 반란을 러시아는 잔인하게 진압하여 수십 만 명이 죽었다. 그런데 이런 소동은 1930년대 러시아,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세발의 피다. 

 

"1940년 처칠이 총리에 오른 시기가 되면, 영국의 통치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대안은 히로히토의 거대한 대동아 공영권, 히틀러의 천년 제국, 무솔리니의 새로운 로마였다.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에 의한 위협도 무시할  없었다….영제국은 여러 세기 동안 피지배민족을 억압했기 때문이 아니라, 훨씬  압제적인 제국과 불과   동안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해체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1900년이 되자 독일이 경제에서 영국을 바짝 추적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거리제국 황태자를 암살한 자가 오스트리아-헝거리제국 점령국의 세르비아계였으므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인들의 본국인 세르비아를 침공했고 범슬라브계 민족의 수호자인 러시아가 개입했다. 마침 독일은 러시아가 더 크기 전에 선제 공격을 해야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협정을 맺었으므로 프랑스와 벨기에는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독일과 싸워야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이 싸우게 되면 프랑스와 러시아는 한 세트였고 먼저 프랑스를 무력화해야한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독일은 벨기에를 지나가야 한다. 영국의 자유당 정부는 프랑스의 패배를 막아야 했고, 외교적 해결이 실패하면 정권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참전을 선언했다.  독일은 이제 영국의 인도 지배의 토대를 잠식하는 전략에 집중함으로써 충돌을 세계화했다. '세계 대전'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것도 이 때 독일이다. 전쟁의 중심은 플랑드르가 아니라 중동이 된다. 이 때 처칠은 제1차 대전은 유럽 본토와 러시아 국경, 중동, 아프리카 등 전세계에 전선이 퍼져있으며 동시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진다. 영국이 중동에서 선전함으로써 숨통이 트이자 오스만트루크가 무너지고, 독일은 휴전을 요청한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이를 반대했지만 영국, 프랑스, 호주,뉴질랜드는 이전의 방식대로 전리품을 분배했다.  아랍민족에게 주기로 했던 아라비아반도를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했고 협력의 댓가로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주었다. 식민지라는 이름 대신 '위임통치령'(mandate)라는 이름을 썼다.  미국의 참전은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300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1300만 명의 인구가 영제국에 추가되었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국채발행으로 영국의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 국채 이자 지불이 중앙 정부 총지출의 절반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추가된 영토의 경제성이 낮은 반면에 관리 비용은 증가했다. 영국은 그 이전에도 국방비의 비율이 높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마저도 삭감되었다. 그 결과 제국 참모총장의 의사 결정은 최대한 모든 전쟁을 연기하는데 집중되었다. 1939년 영국의 야포 사거리는 독일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제국의 해체

1920년에 아일랜드가 북부 프로테스탄트와 남부 가톨릭으로 분리되었다. 로이드 조지 수상은 가까스로 남부 아일랜드를 제국 내부에 붙잡아 두었다.  

 

인도의 경우, 이미 세포이의 전통이 있는 인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함께 싸웠다. 이 시기에 간디가 참전을 동포들에게 호소한 것은 너무 당연한 행동이었다. 1917년 영국은 인도의 독립 정부를 약속했지만 그 이행 과정은 느렸고 전시체제를 전후에도 계속 연장했다. 이 때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영국은 집회 군중에 대한 발포로 답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반발하자 영국은 인도인들과 협의 없이 인도의 전쟁 참여를 발표했다. 이 때도 간디 등의 저항은 쉽게 정리됐으며 유일한 저항인 미얀마의 일본 사단은 인도 육군에 의해 1944년 제거되었다. 대체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인도인들은 영제국 편과 함께 전투에 충성스럽게 임했다. 대일본공영권이 그들의 미래가 아니라고 느낀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미국에 의한 영제국의 해체 

제2차 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영제국의 종속 국민들에 대한 공식적인 통치에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대전 중 영국과 협상 중에도 "영국인들은 감비아에 1달러를 투자해서 10달러를 가지고 간다"라고 말하면서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루스벨트는 심지어 처칠에게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라고까지 말했다. 처칠은 그럴테니 미국 남부를 국제 사찰받게 하라고 맞받아쳤다.  결정적으로 루스벨트는 전후에 구대륙 제국들에서 만들어낸  모든 식민지들을 '신탁통치'라는 독립국의 형태로 바꿀 것을 구체화했다. 이 과정을 사찰하기 위해 U.N이라는 조직을 만들 것이었다.1942년에 미국 국무 차관 섬너 웰스는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다."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어떤 제국주의 비판이나 히틀러의 표현보다 영국에 적대적인 말이었고 무게감은 그보다 더 강력했다.  결론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미국은 영제국체제를 본격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이미 영국인들은 미국인들의 신탁통치체제가 미국 중심의 새로운 제국주의의 외관임에 대한 많은 담론들을 만들어냈다.  존 메이나드 케인스가 미국 재무팀과 협상에 임했는데 미국인들에게도 위대한 케인스는 "그저 모든 답을 알고 있는 녀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처칠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노동당 소속 장관조차 식민지의 해체에 무의미한 불만을 표시했다. 어쩄든 이때 이미 영국은 재정적으로 파산한 상태였다. 

 

결정적인 한방 - 수에즈 사태 (1954)

1954년에도 수에즈운하에는 영국군 8만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1952년에 이집트인 젋은 군장교들이 이집트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나세르 대령을 지지했는데, 소련과 경쟁이 붙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나세르가 영국군의 철수를 요구할 때, 미국이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1956년 여름에 마지막 영국군이 철수했다. 그 다음 수순으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 이에 11월  수상의 발의로 영국-프랑스 원정대가 수에즈에 도착하자 이집트인들이 운하를 봉쇄한다. 순간 잉글랜드 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한다. 아이젠하워는 IMF등을 통해 영국의 이든 수상에게 10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영국을 이집트에서 떠나보낸다. 

 

영국은 1947년에 영국을 떠난다. 독립 과정에서 인도인 각 정파의 분쟁으로 20-50만 명이 죽고 1951년에 팔레스타인 인구의 10%인 700만 명이 난민이 된다. 1949년에는 팔레스타인에서 허둥지둥 빠져나왔다. 미국-소련 중심의 냉전체제로 세계가 바뀌고 있었고 영국은 그 틈에 끼어들기엔 너무 가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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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개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나에서 시작된 첫 번째 의문과 그렇다면 영제국의 출현과 세계의 지배가 과연 인류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아니면 부정적인 영향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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