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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로크

독일 낭만주의 대학 제도의 발전 과정 (17세기말 이후)

2021. 7. 2.

"빙켈만의 획기적인 저서 '고대미술사'가 나온 1754년부터 슈뢰딩거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1933년까지 독일은 지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서구의 열등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올라서면서 프랑스나 영국, 네덜란드, 나아가 미국보다도 사상의 영역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문화와 지적인 측면으로 보면 1750년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 프리드리히2세가 서거한 1786년까지 독일은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일어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에 필적할 만한 독일의 르네상스를 이뤘음을 증명했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제3차 르네상스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독일적인 현상이다."(피터 왓슨, 저먼 지니어스)

 

 

이신론(Deism)

16세기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관이 역학 분야에서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주는 천상계와 지상계로 나누어져 있고 이 둘 사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등이 논의되었으며 이런 지식 체계를 바탕으로 451년 칼케돈회의에서 삼위일체설이 공인된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20세기에 와서야 교황청의 사면을 받았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붕괴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상계/지상계 이분법을 대체한 새로운 과학관에 맞춰  나름대로 삼위일체설을 각자 검토해봐야했다. 이 과정에서 삼위일체설에 대해서 소치니주의나 유니테리언들이 나온다. 아이작 뉴턴이나 제퍼슨 등은 여기에 속한다.

 

한편으론 성경의 해석에 있어서도 다른 고전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지리학적, 지질학적 발견 등이 성경에 적힌 것과 일치하지 않는 불편함에서 비롯됐다. 성경에 따르면 지구의 나이는 6,000년 정도인데 이는 지질학의 발견과 달랐다.

  성경해석에는 예전부터 '적응'이라는 개념이 있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성경 속의 어떤 본문들은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청중의 문화 상황에 적합한 언어와 심상을 이용한다. 칼뱅도 이런 본문들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원래 청중의 지식 수준에 맞춘 '적응'된 표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이 부분은 천동설/지동설 논란과 관련하여 칼뱅이 내린 과학적 언급이다. 잉글랜드의 과학자 에드워드 라이트(1558-1615)는 칼뱅의 논지를 직접 적용하여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기도 했다. 또한 30년 전쟁(1618-1648)과 영국 내전부터 청교도 공화국, 명예혁명에 이르는 시기를 거치면서 (1641-1688) 종교적 관용에 대한 공감이 대두되고 그 지침이 되는 성경 해석의 장치로 존 로크는 에라스무스 최소(Erasmian minimum)를 주장했다.(1695) 멜랑히톤은 각 교파 간에 의견 불일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해석 차이를 아디아포라(adiaphora)로 표현한 바 있다. 이런 전통은 1820-1830년대 슐러이어마허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당시에는 슐라이어마허의 작업을 '고등비평'이라고 했다. 

 

이신론이 대두된 또다른 계기는 천연두 접종의 보급과 관계되어 있다. 볼테르에 의하면 종두법은 시르카시아에서 시작되었다. 시르카시아는 가난하지만 여인들이 아름다워서 오스만제국의 부유한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천연두가 퍼지면 커다란 재앙이 되므로 일찌기 종두법을 발견했다고 한다. 1714년 오스만제국 일부에서 시행하던 천연두 접종이 영국 왕립협회에 보고되고 유럽에 널리 퍼지기 시작하는데 주로 종교인들이 이를 반대했다. 이교도들의 지역에서 넘어온 의학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신의 섭리나 예정설 등이 흔히 인용되는 이유라 그러한 해석상 비본질적 내용들은 약화될 필요가 있다는 에라스무스의 최소주의가 마땅히 적용되어야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볼테르같은 이 시기의 종두법 찬성론자들은 상당히 앞선 사람들이라는 것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특히 볼테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영국은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이미 시행하고 있는 종두법을 사제들과 의사들의 반대로 1723년에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프랑스에 대해 한탄한다.     

 

이신론은 특히 영국에서 많이 받아들여졌는데 존 로크같은 성공회교도뿐만 아니라 일부 성직자들과 주교들도 받아들였다. 칼뱅주의자들 안에서 이신론은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볼테르 등을 매개로 프랑스에 들어간 이신론은 가톨릭과 크게 충돌한다.  

 

경건주의(Pietism)

독일 지역 가톨릭 제후들과 개신교 제후들의 갈등으로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국제전인 30년 전쟁(1618-1648)의 여파로 1670년 경 루터파 독일 지역에서는 이성주의적, 신학적 접근이 아닌  종교적 체험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난다.(검토한 자료들 중에서는 찾아보지 못했는데 1685년 낭트칙령철폐 후 2만 명의 위그노들이 프로이센 지역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도 성장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운동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에게 직접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프로이센은 경건주의자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1690년대에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크게 받은 경건주의 지식인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 등은 할레 대학 신학부의 교수직에 임용된다. 그들은 국가의 역할을 경건주의의 목표 안에서 재정립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이들을 할레파 경건주의자들이라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재위 1713-1740)는 이들 할레 경건주의자들을 적극 지원했고 그 자신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원이었다.  예를 들면 1729년에 프로이센의 루터파 목사들은 모두 할레 대학 신학부에서에서 최소 2년간 연수를 해야했다. 1723년엔 계몽주의자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가 할레대학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볼프는 계몽군주 프리드리히2세가 즉위하자 복권된다.(1740)  이런 분위기 속에 국가 경건주의 (State Pietism)을 형성했다. 경건주의 지식 기지는 칸트가 배출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도 설치된다. 프로이센 동북부 교회의 성격은 경건주의가 지배하게 된다.

 

1718년에는 100여 명의 경건파 목사들이 군목으로 임명되어 경건주의 신앙을 지도하고 병사의 가족들을 교육했다. 수백 개의 연대 단위 학교들이 설립된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견진성사를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교육 정책과 경건주위 정책은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때까지 이어진다.  

 

새로운 대학들 

1700년을 전후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대학들도 사제직을 위한 학위취득용 고시학원화되면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독일 군주들은 새로운 대학을 설립한다. 프로이센의 할레대학(1694), 슐레지엔의 브레슬라우대학(1702), 하노버의 괴팅겐 대학(1713), 바이로이트의 에를랑겐 대학(1702). 하이델베르크대학도 쇄신에 들어간다. 괴팅겐 대학의 경우 전통적인 신학부의 검열권을 제한했다. 또한 신학부와 법학부로 가기 위한 교양과정에 불과했던 철학부를 강화하고 근대 언어, 문헌학,고고학,경험철학, 물리학, 응용수학 등의 과목을 신설했다. 비쎈샤프트라는 용어도 이때 괴팅겐대학에서 처음 만들어진다. 경건주의자 헤르만 프랑케는 할레대학에 '세미나'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중요한 혁신을 이루었다. 세미나 제도는 독창성을 요구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박사학위의 기준이 정립되어 공무원 승진에서 중요한 학위로 인정되었다. 여기서 교양(Bildung)이라는 개념이 성장한다.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으로 새로운 계층이 출현한다. 경건주의성직자-대학-공무원제도-군부가 뒤엉켜서 국비로 새로운 교양 계층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역사주의, 생물학의 성립 

 

1760년쯤 되자 지리학적 발견들과 정통 교리, 경건주의, 이신론,성경해석 사이에서 기독교 연대기와 관련한 역사학을 조정해야할 필요성이 생겼다.  18세기 괴팅겐 대학의 아헨발, 요한 슈테판 퓌터,아우구스트 폰 슐뢰처 등은 홉스와 자연법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가정, 시민단체, 국가의 기본틀로부터 역사가 발달해온 과정을 기술하는 방법을 확립한다. 

 

1640년 데카르트는 기존의 영혼/육체의 이분법을  정신/물체의 이분법으로 다르게 나누었다. 영혼과 육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구분에서 오는 이름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영혼만이 실체적 형상이었다. 갈릴레이의 활동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느끼는 메르센(1588-1648) 등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그 영향 하에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라는 두 개의 실체가 서로 영향을 준다는 모델을 만들었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낯선 체계였다. 

 

1690년 존 로크는 '인간지성론'에서 행동의 동기가 영혼에 작용하는 초월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경험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독일에서는 역사 발전 법칙과 존 로크의 맥락의 정신을 결합해서 역사발전을 정신의 힘의 성장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자리잡힌다. 

 

존 로크의 '정신'에 매료된 할레 대학의 크리스티안 볼프의 수제자였던 알렉산더 바움가르텐(1714-1762)은 인간 정신의 창조성을 다룬 분야인 '미학'(1750-1758)을 만들었다. 괴팅겐 대학 출신의 이자크 이젤린(Isaak Iselin,1728-1782)은 1768년 그의 책에서 자연을 극복하기 위한 정신의 투쟁을 분석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적인 정치적인 외적 자유와 대조되는 내적 자유, 정신의 자유라는 독일적 자유 개념을 만든다. 정신에 대한 이런 접근법들을 역사주의라고 부르게 됐는데 전통적인 계몽주의의 영역인 자연 현상과 역사 현상이 다르다는 견해가 계속 반복되었다. 이들은 인간의 정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교양국가(Bildungsstaat)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주의적 접근은 또한 뉴턴이 애썼던 과학 혁명의 분야가  다루지 못하는 자연의 영역에 집중하는데 이는 장차 생물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 개념은 이 분야에서서 계속 살아있었고 1859년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나오기 전까지 정향진화설을 이루었다. 괴팅겐 대학의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1752-1840)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 19세기 전반의 중요한 생물학자 중 절반을 가르쳤다. 그는 수많은 실험 결과 생물에게는 형성 충동(Bildungstrieb)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 개념은 칸트와 셸링에게 영향을 주었다. 칸트는 특히 형성충동은 기계론적 수단과 언어로 이해할 수 없고 목적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데 주목한다. 말하자면 역사주의적 접근은 역사와 생물 영역에서 자신의 설명 방식의 적절한 대상을 발견했다. 

 

또한 이런 풍토의 독일에서  진화론은 인기가 높았다.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는 블루멘바흐의 형성충동(Bildungstrieb)에 관심이 많았는데 물질이 여러 힘으로 이루어졌고,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형성, 번식, 습성인데 이것이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을 만들기 때문에 국가는 유기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로써 원래 마르틴 루터가 하느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Bildung개념은 국가 안의 개인의 완성이라는 이상에 이바지하는 개념으로 세속화된다. 이로써 교양(Bildung)은 루터적 전통,경건주의,계몽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지식 활동과 개인 도덕의 지향점을 제시해주는 마법의 단어가 된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요하임 빙켈만(1767-1832)은 할레대학에서 공부했다. 고고학 발굴로 유명한데 '고대미술사'(1764)에서 한 예술 양식이 한 예술 양식으로 발전해간 과정을 진화의 단계로 파악함으로써 역사주의 작품의 한 획을 긋는다. 고대와 근대 사이에 역사적 차이가 있다는 그의 관점은 헤르더, 괴테,프리드리히 빌헬름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헤겔에게 영향을 준다. 또한 그리스적인 영원한 아름다움의 역사적 바탕이 된 침략당하고 쇠퇴한 그리스의 실제 아테네 역사는 독일인들의 그때까지의 힘겨운 고통을 떠올리게 했다. 이로써 그리스 정신은 교양의 구체적인 내용의 일부가 되었다.  

 

괴테, 실러, 헤르더,프랑스 대혁명

요한 볼프강 괴테(1749-1832)는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1757-1828)의 친구였다. 카를 아우구스트는 어니스트 계열의 베틴 가문인데 원래 작센선제후직을 가졌다가 1547년 슈말칼덴 전쟁에서 카를 5세에게 패하고 튀링겐 지역의 작센-바이마르공국을 받는다. 카를 5세와 같은 편인 알베르트계열의 베틴 가문은 승리의 결과 작센선제후령을 이어받았다.  알베르트 계열의 베틴 가문은 작센선제후 외에 1697년부터 1763년까지 폴란드왕을 겸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폴란드분할을 한 것 때문인지 나폴레옹에게 협력했다. 나폴레옹의 패전 후엔 폴란드뿐만 아니라 영토의 절반을 프로이센에 합병당한다.  카를 아우구스트는 세계적인 히트작인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저자인 괴테를 1775년 바이마르로 모셔온다. 나폴레옹도 이 책을 일곱 번 읽었다. 1776년 카를 아우구스트는 괴테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요한 장관직을 맡긴다.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1796)을 써서 교양소설로 알려진 독일 특유의 관념 소설의 전통을 연다. 

 

헤르더(1744-1803)는 칸트에게서 배웠고 파리에서 디드로,달랑베르의 살롱에 드나들다가 그랜드투어 가정 교사를 하던 중 함부르크에서 카를 아우구스트와 괴테의 눈에 띄어 바이마르로 가서 죽을 때까지 바이마르 궁에서 일한다. 그는 국가를 루소식의 개인들과 군주의 계약 관계로 보지 않고 공동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자연적 실체로 보고 교양을 그 안의 시민 계급의 임무로 보았고 교양 시민 중에 천재가 탄생하도록 하는 것을 국가의 의무로 보았다. 또한 유전과 경험이 결합하여 시대정신(Zeitgeist)이 출현한다고 봤다. 

 

군사학교 의학부 출신으로 정신과 육체의 관계를 논한 중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경력을 시작한 프리드리히 실러(1759-1805)는 군도(1782), 간계와 사랑(1784), 돈 카를로스(1787) 등 희곡을 통해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주의와 자유의 한계를 비판했다. 

 

프랑스대혁명 시대에 독일의 지식인 층은 혁명을 환영했으나 공포시대(1793-1794)를 거치며 구역질을 느꼈다. 1796년 당시는 역사학자였고 바이마르에서 작위를 받은 실러는 '발렌슈타인'(1799), '메리 스튜어트'(1800), '빌헬름 텔'(1804)을 발표하였는데 발렌슈타인은 당시의 나폴레옹을 빗댄 인물로 이성이 인간의 발전을 규정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독일관념론철학자들(1770-1840)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랐고 그가 나온 김나지움도 경건주의 운동의 일부로 운영되는 학교였다. 그가 평생을 보낸 쾨니히스베르크는 많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알고 있는 영국인들이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영국 군함의 목재가 여기에서 선적되었다. 칸트의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1859년 다윈의 진화론 이전에 이성과 기독교 신앙의 위치를 잡아주는 대표적인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칸트는 토마지우스, 크리스티안 볼프, 모제스 멘델스 존 등 심리학을 태동시킨 철학 분야 흐름의 절정에 섰다. 이것은 아직 생물학이 없던 시대에 신이라는 존재의 개입 없이 인간을 설명하려는 경건주의자들의 노력의 흐름이었다. 이것이 바로  1770년대에서 1840년대까지 쾨니히스베르크, 베를린, 바이마르, 예나에서 관념론철학자들이 탄생한 배경이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칸트, 헤르더, 피히테가 나왔고 피히테, 헤르더는 바이마르에서 활동한다. 예나대학에선 라인홀트를 이어 피히테, 셸링, 헤겔이 관념론을 발전시키며 실러, 횔덜린, 노발리스,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보조를 맞춘다. 그 뒤를 이어 슐라이어마허, 아우구스트 슐레겔, 프리드리히 슐레겔, 빌헬름 폰 훔볼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이 활동하는데 후기엔 대체로 1810년에 설립된 베를린대학에 모이는 경향이 있었다. 독일관념론은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의 패배(1806) 이후 보수적,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는 프로이센의 반성적 근대화의 배경이 된다.  독일 관념론은 'Deutscher Idealismus'의 번역어인데 여기서 'idea'는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를 뜻한다. 이를 '실체'로 번역한다. 

 

칸트의 '판단력비판'(1790)에서 자연의 목적은 인간 본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파악은 과학적이지 않고 미학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낭만파 운동이 결집하는 계기가 된다.  예술은 그 자체에서 목적이 온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는 확장된다. 

 

작센 출신의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4-1814)는 심리학 출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칸트에게서 배우고 예나대학에서 가르쳤다. 피히테는 자유를 자아와 비아(not-self)의 사이의 관계로 파악한다.  칸트의 내면의 자유는 다른 자아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한계까지의 자유가 된다. 국가는 다양한 시민이 서로 배려하도록 각각의 주관적 관점을 억누르는 것으로 비슷한 시기의 제레미 벤덤과 비슷한 말이다. 1810년에 초대 베를린대학 총장이 된다. 이즈음  그는 국민민족주의를 만들었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의 프랑스에 대한 패배 직후 나온 공동체적 고통은 이런 식으로  거대한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태동시킨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그의 저서 '종합지식학의 토대'는 16회나 찍었는데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전혀 새로운 방식이었다. 

 

헤겔(1770-1831)은 튀빙겐대학의 신학부 학생이었으며 칸트와 피히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역사가 최고로 발전하면 더 이상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없는 절대지 상태의 사회제도를 형성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1830년대 이후 이 테제를 발전시킨 청년헤겔파가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포이에르바흐, 마르크스 등이 있다. 

 

헤겔의 후임인 프리드리히 셸링(1775-1854)은 이러한 심리학의 태동 과정에서 처음으로 무의식을 언급했다. 세계는 총체적인 무의식에서 자의식 단계로 변하는 현상이다. 피히테의 의지와 셸링의 무의식은 낭만파 운동의 미학적 중추를 형성한다. 셸링은 자연의 끝없는 생산성을 무한한 진화로 여겼는데 독일 낭만주의는 다윈 이전에 진화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또한 셸링은 사물의 체계에 대한 역학 법칙, 생물들의 진화법칙, 인간의 의식에 대한 체계를 언급하며  오늘날의 창발적 진화를 말하려 했다. 

 

나폴레옹시대의 자극

1806년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1814년까지 지배받게 되는데 이 시기에 프로이센은 자기 반성을 하고 개혁에 노력하게 된다. 국가가 유기체라는 생각에 도달한 블루멘바흐의 제자 빌헬름 폰 훔볼트(1767-1835)가 이때 장관직에 취임한다. 그는 대학입학시험인 아비투어제도를 만들고, 김나지움이라는 학교 시스템을 거친 학생들만 이 시험에 응할 수 있게 했으며, 1810년 교양학부인 철학부가 전문학부인 신학부, 법학부보다 우위에 있는 베를린대학을 만들어 철학부졸업자들이 김나지움의 선생님으로 취업할 수 있는 선순환시스템을 만든다. 이때 그는 인문학부를 자연학부보다 우위에 뒀다. 이 모든 개혁은 몇 달만에 이루어진 것이고 곧 그는 장관직을 그만뒀다. 

 

1810년에 피히테, 슐라이어마허,사비니가 베를린으로 왔다. 초기에는 문헌학과 역사학 중심의 철학부(교양학부)의 혁신이 있었다. 이 때도 지배적인 사고는 낭만주의였다. 1830년대 이후엔 과학 분야가 세계 최고 분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과학 분야의 졸업생은 1860년대 이후엔 교직 말고도 산업계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프로이센에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세미나 제도도 발전해서 우수 보고서에는  꽤많은 상금도 주었다. 과학전공자들은 베를린 대학을 장악한 헤겔주의자들, 낭만파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 순수 과학에 대한 낭만주의적 방어를 이끌어냈다. 순수과학도 정신을 단련하고 개인의 교양을 발전시키므로 빵을 위한 학문(Bread Study)은 아니다. '빵을 위한 학문'이라는 신학,법학,의학 등 전문과정에 대한 비판적 단어는 이때 생겼다. 화학과 생명과학이 철학부(교양학부)의 필수 과목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디리클레, 헬름홀츠 등이 이 시기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C.G.J 야코비(1804-1851)는 베를린 대학에 입학해서 문헌학에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835년 그는 수리물리학 세미나를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개설하고 모든 참여자에게 20탈러(2,000달러)를 지급했다. 물리학세미나는 이어 할레대학(1839), 베를린대학(1864)에도 등장한다. 야코비와 디리클레 밑에서 리만(1826-1866)이 연구하고 괴팅겐으로 돌아갔다. 1854년 그는 리만기하학을 발표한다. 

 

펠릭스 클라인(1849-1925)은 본대학 출신으로 뮌헨대학에서 막스 플랑크를 가르치고 1886년부터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괴팅겐 대학을 세계 최고의 수학센터로 만들었다. 19세기 무렵에는 프랑스의 폴리테크닉을 중심으로 라그랑즈, 몽주 등이 수학을 주도했지만 독일이 이 무렵 이 흐름을 이어받아 히틀러 시대까지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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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주의

경건주의는 Pietismus를 번역한 것이다. 17세기 후반의 프로테스탄트 독일에서 일어나 18세기 전반에 최전성기를 맞이한 교회개혁의 지향과 운동의 총칭. 칸트 시대에는 P. J. 슈페너가 창시하고 A.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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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독일을 보라!칸트에서부터 헤겔,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아인슈타인…….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3세기 동안 무수한 성취를 남긴 독일 천재들,나치, 히틀러, 세계대전에 가려진 그 찬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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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6. 14.


관용령(The Toleration Act) 이전 고교회파시절(1530-1689)

헨리 8세(재임: 1509-1547)는 1530년대에 로마 가톨릭에서 이탈하고 수장령을 선포하여 성사 집전을 제외한 영적, 세속적인 측면에서는 잉글랜드의 교황이 되었다. 영국왕은 영국이라는 교회, 즉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며 주교를 통한 성직자 임명, 로마 가톨릭적 전례의 형식 등이 유지된다. 이를 고교회파(High Church)라고 한다. 당시 칼뱅주의 신자들은 장로제, 총회제도의 채택, 전례의 혁신을 주장했는데 에드워드 6세(1689-1553)의 짧은 시기에 전례적인 측면에서 급격한 개혁이 있던 시기를 제외하면 메리 튜터(1553-1559), 엘리자베스여왕 (1558-1603), 제임스1세 (1603-1625), 찰스 1세 (1625-1649) 시기 모두 이런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또한 재침례파, 퀘이커 등 급진종파를 고려해서 칼뱅주의에서 감독제를 거부하는 독립파(회중파)에 속한 올리버 크롬웰의 군사 정권인 잉글랜드 공화국(1649-1660) 시절에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긴 했지만 왕정복고 이후 다시 고교회파로 복귀해 찰스2세(1660-1685)와 제임스2세(1685-1688)의 시기로 이어진다.

교회 정치 제도와 전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서 주교직제와 같은 요소는 성경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 공동체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인 제도로서 폐지할 정도로 그렇게 나쁜 제도가 아니라는 것이 고교회파의 입장이다. 무엇보다 왕들은 그런 요소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칼뱅주의자들은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요소들의 폐지를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예를들면 성직자는 로마가톨릭처럼 왕의 대리인 주교가 임명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가톨릭 신자를 자처한 제임스2(1685-1688)를 쫓아내고 칼뱅파 네덜란드의 윌리엄과 제임스1세의 딸 메리 부부가 왕위에 오른다. 이 과정을 명예혁명이라고 한다. 1689년 관용령에 의해서 오렌지공의 시대에는 삼위일체만 받아들이면 가톨릭을 제외한 어떤 예배도 자유였다. 이 시기엔 잉글랜드 국교회에 소속되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정치권을 행사하기 위해선 국교회 소속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국교회는 다른 종파처럼 하나의 교파에 불과하게 된다. 이때부터는 국교회가 아니라 영국성공회가 된다.

18세기 광교회파(Broad Church)와 이신론(Deism)

 

1640년대 영국의 왕립협회가 결성되었다.창립회원들은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는데 엄격한 칼뱅파와 왕들이 추구하는 고교회 사이의 제 3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들은 자연 세계는 이성이 확인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변증학(apologetics)이라는 신념 체계를 유지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찾았다.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 등이 왕립협회에 속했는데 그들의 친구인 존 로크가 이를 잘 표현했다. 그는 "계시를 지키기 위해 이성을 포기하는 것은 양쪽 불을 끄는 것과 같다."라고 믿었으며 에라스무스주의의 관용론을 받아들여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 '에라스무스 최소'라 불리는 신앙의 핵심으로보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로 분류했다. 존 로크가 생각하기에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싸움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할 수 없는 지적 능력의 토대를 필요로 하므로 인류 모두의 신앙의 핵심이 될 수 없었다. 영국의 경험론을 받아들인 볼테르에 가서는 이것이 이신론(Deism)으로 변하고 계시의 비중은 훨씬 줄어든다.  볼테르는 영국식 광교파에서 불가지론자 사이의 길에 있었다. 당시 생토뱅의 베네딕투스회 회원들은 볼테르와 루소의 흉상을 세웠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이성과 종교는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달았다.

 

혁명기의 교회재산의 몰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납득할만한 것이었지만 주교구의 조정을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성직자들에게 묻지도 않고 혁명 의회가 단행하자 문제가 생겼다. 160명의 주교 중 153명이 혁명에 등을 돌렸다. 볼테르주의는 이성 종교라는 희한한 형태로 나타났는데 볼테르와 라파예트의 초상화로 가톨릭 성물을 대체하는 식의 국가 행사 형태를 시도했다. 순교한 혁명가의 심장을 단지에 담아 제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들은 오라토리오회나 베네딕투스회원이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혁명 즈음에 로마교황청은 그 수명을 다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교황청과 손을 잡음으로써 부활한다. 그 상징적 계기가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1802)이다. 혁명기의 이성 종교의 실험에 질린 당시 사람들의 심성은 샤토브리앙의 '기독교의 정수'(1802)의 가톨릭 낭만주의에 반영되었다. 

 

한편, 지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의 발전은 성경 해석과 이성이 충돌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존 로크가 추구하던 노선에 다른 측면에서 균열을 일으켰다. 그 결과 1820년대 슐라이어마허의 고등비평이라 불리우는 일종의 메타비평인 해석학(hermeneutics)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다시금 추구하지만 다윈 등의 등장으로 1830년대 이후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서 이탈한다. 

 

19세기 복음주의와 옥스포드 운동

1828년에는 영국에서 비국교도들도 공직자가 되거나 의회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 가톨릭교도들의 신분도 정상화됐다. 1832년 참정권이 확대되고 선거구가 개혁됐는데 대체로 성공회에 불리한 내용이었다. 국가는 점점 성공회에서 발을 빼고 있었다. 이에 대한 성공회의 반응은 복음주의와 성공회-가톨릭주의였다. 

1830년대에 옥스포드 운동이이라는 방식으로 성공회-가톨릭주의가 대두됐는데 왕권신수설이 빠진 고교회파의 르네상스였다. 정부의 선거구 조정과 관련하여 주교구 몇 개가 합병되자 옥스포드대학에서 존 키블, 존 헨리 뉴먼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항의가 시작됐다. 이들은 동시에 친로마가톨릭주의자였다. 1830년대 말에는 자유주의 및 개혁정치인에 대한 반대와 반종교개혁성향으로 발전된다. 이 운동은 사제를 중시하는 신학과  케임브리지대학 캠던 건축 연구회가 주축이 되는 교회 건축 운동(the Ecclesiological Movement)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사제, 건축과 의례를 중시하게 된다. 성직자는 높은 단 위에 놓고 신자석은 발코니나 기부 특별석을 없애고 평등한 장의자로 바꾸는 이분적 구조로 배치하는 등 모든 요소에는 사제의례주의에 합당한 의미가 부여된다.  독수리상이 새겨진 독서대가 등장하자 이러한 의례주의(Ritualism)는 비판에 휩싸이게 된다. 1870년에 제단에 꽃병 사용이 합법화되었다. 제대 촛불은 1890년에 가서야 켤 수 있었다. 그 밖에 복장과 물건 등에서도 가톨릭보다 더 가톨릭적인 요소들이 도입된다. 1870년대에도 의례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법적 소송에 휘말리는 등 탄압을 받았지만 1890년대에는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후 가톨릭주의자 주교가 많이 임명되는 등 이들은 빠르게 성장한다. 의례주의는 시골까지 포함해서 모든 영국을 휩쓸게 된다. 성찬례가 주일 예배의 가장 중요한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이다. 이 시기 정도부터 이런 것들은 모든 영국 국교회의 특징이 되었고 이런 특징을 이끌어 온 성공회-가톨릭주의라는 단어는 사라져 갔다.   

같은 시기에 생활 방식과 교리, 실천을 강조하는 복음주의도 성장한다. 이 중 클래펌파는 노예 무역 폐지에 앞장서서 1833년 노예제도는 대영제국에서 폐지되었다. 또한 성공회 내부에서 감리교의 등장으로  회심이라는 요소가 교인의 징표가 되고 회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 목회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19세기초에 종말론의 요소도 복음주의의 큰 요소였는데 시오니즘 지지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성서가 문자 그대로 오류가 없다는 주장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조지프 베일리이다. 마침내 1848년 복음주의자 존 섬너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다. 그는 전례에 있어서 형식주의를 반대했는데 복음주의자들이 대체로 이러한 로마가톨릭적요소를 종말론적인 해석과 관련하여 반대했다. 19세기말에 가면 복음주의는 의례주의(Ritualism)에 반대하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 1960년대에는 미국 성공회에서 은사주의 운동이 시작된다. 이는 형식이 없는 예배와 찬양을 특징으로 하는데 성공회복음주의는 기도서 중심의 예배였다. 은사주의에서는 기도서 대신 파워포인트가 등장한다. 은사주의는 전세계적인 추세로 자리잡는다.

 

18세기의 합리주의적-자유주의적 전통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광교회파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전통을 이어갔고 이런 경향은 일부 고교회파 인사들에도 침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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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역사가가 보여주는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로마제국 변방, 유대교의 한 분파에 지나지 않던 기독교가 오늘날 어떻게 세계 종교가 되었는지 살펴본다. 또한 서양문명의 설립과 역사 발전에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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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가운데 `성공회`를 다룬 저작. 옥스퍼드 커드스던 리펀 칼리지의 학장이자 성공회 사제인 저자 마크 채프먼은 그리스도교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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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종교개혁

본서는 맥클로흐가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에 대한 내용들 중, 특별히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물론 앞 부분에서 영국 이외의 종교 개혁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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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 The West and the Rest) /2011(2011), 21세기북스

2021. 4. 29.

"이 책의 목적은 부, 영향력,힘 측면에서 서양의 문명을 그토록 확대시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이 책은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와 함께 만들어진 책이다. 서론에서 위의 인용문에 대한 대답을 검토한다.

 

  • 지식,기술인가? : 16세기에는 그러지 않았다.
  • 문화적차이인가?(막스 베버의 주장)  : 개인주의, 휴머니즘, 신교도윤리 등. 재정적 매개체와 훌륭한 정부가 뒤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David S. Landes, The Wealth and Poverty of Nations, 1995)
  • 결국은 제도 : 문화가 같은 두 집단 비교 실험을 마침. 남한과 북한, 동독과 서독 등

그래서 퍼거슨은 제도와 관련된 여섯 가지 개념으로 답한다. 이는 물론 티브이 시리즈 목차를 위한 것일  뿐이다. : 경쟁, 과학, 재산권, 의학, 소비 사회, 직업윤리. 예를 들어 유럽이 아프리카를 유린한 것은 단지 맥심기관총 때문만은 아니고 열대병 예방 백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등등. 

 

경쟁은 근대 민족 국가와 자본주의의 발판을 만들었다. 과학은 일단 서양에 군사적 강점을 제공했다. 재산권은 가장 안정적인 대의제의 기반을 형성했다. 의학은 장기적으로 식민지인들의 평균 수명 역시 획기적으로 높였다. 소비는 산업 혁명을 유지시켰다. 구소련권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것을 시도했지만 결국 소비와 관련이 없어 붕괴한다. 직업윤리는 다른 모든 요소로부터 오는 불안과 사회 역학을 고정하는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얼개와 구체적인 논거들은 좀 성긴 편인데 이 책이 원래 티브이 시리즈에 기반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청소년들이나 비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우수한 서양인들은 앞으로도 잘해야겠다.  우리 이런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것 같다. 특히 뒷부분을 보면 서유럽이 이끌었던 이 한덩어리의 발전은 로마제국이나 오스만제국의 갑작스런 몰락 등을 볼 때 한 세대가 걸리지 않는 점, 중국의 부상이 의미하는 바 등을 진정 걱정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메시지가 곳곳에 나오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심 표현을 조롱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야심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세네갈에서 식민 통치는 서른 살에서 마흔 살로 10년 정도 수명 연장이라는 효과를 수반했다."

뭐 이런 진부한 우월주의적 표현들이 종종 나오더라도 책을 덮거나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에서 나는 몇 가지를 새롭게 배웠다. 

 

1. 존 로크와 루소의 차이

 

존 로크의 정치이론의 핵심은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대표를 뽑고, 대표들의 동의가 있어야 세금을 징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즉, 재산권의 보호였다. 캐롤라이나를 하사받은 귀족들 중 하나인 샤프츠베리의 후원을 받던 로크는 1669년 캐롤라이나 기본 헌법을 만들었는데, 이 틀이 구현되었고 신대륙 토지 분배 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프랑스 인권선언은 이를 대부분 반영했는데 독창적인 것은 루소의 '일반 의지'이다. (인권선언 6항 -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일반의지는 다름 아니라 전통적인 유럽의 세습 왕가를 대치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1793년 10월 자코뱅파의 처형, 1794년 4월 당통의 추종자들의 처형, 로베스 피에르의 처형 등으로 돌고 돌다가 쿠데타로, 총재 정부로, 나폴레옹 황제로 일단 귀결된다. 

 

2. 우생학과 분리주의

 

"100년 전만해도 인종차별은 시대를 역행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이 초래한 지구 온난화 이론을 열렬히 받아들이듯 당시 과학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을 몹시 환영했다."

 

20세기 처음 10년간 독일은 과학 발전의 최전선이었다. 여기서 모든 질병으로부터 면역력이 높은 미래의 인류-초인을 만들기 위한 우생학이 인기를 끌었다. 그 결과 인도주의에 대해 인종 차별이 합리화됐고 식민지 관리들의 다양한 행동에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었다.

 

또한 북아메리카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와서 원주민들이나 노예들과 자연스럽게 분리가 됐지만  남아메리카의 이민자들은 16세기부터 남자만 오는 경우가 많아서 크리올,메스티조,뮬라토 등의 혼혈 카스트 제도가 발달된다. 남미의 가난은 혼혈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이런 생각은 1968년 분리주의를 호소한 조지 월리스가 미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절정에 달했다. 1967년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주가 16개나 되었다. 이는 이를 금지하는 대법원 판결이 난 뒤였지만 테네시주는 1978년까지, 미시시피주는 1987년 12월까지 법을 폐기하지 않고 버텼다. 

 

 3. 오스트리아-헝거리 2원제국

 

오랫동안 이해가 안갔던 이 체제는 잉글랜드제국-스코틀랜드 관계를 카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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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왜 세계는 서양 문명에 지배받았는가?600년간의 세계사를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되짚어가며, 서양 문명의 비밀을 밝혀내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 『시빌라이제이션』은 출간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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