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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

헬레니즘 시대의 유대왕국

2020. 11. 24.

알렉산더의 사후 (BC323) 제국은 그리스 본토의 안티고노스, 시리아의 셀류싯,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의 3대 그리스왕조로 분할된다. 처음에 유대지방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역이었다. (BC319-198) 이 때, 셉투아긴타가 쓰여진다. 그러나 후에 로마의 중재로 셀류싯 왕조가 유대 지역을 차지하게 된다. 

 

기원전 176년에 로마에 볼모로 잡혀 있던 셀류싯 왕가의 안티오코스 4세(에피파네스)가 집권을 시작하면서 교조적인 헬레니즘 정책을 펴는데, 이는 이미 이전부터 헬라화에 반감을 가진 집단인 하시딤의 반항을 불러온다.  

 

당시 유대 민족의 대제사장은 오니아스 3세였다. 대제사장 가문이 아닌 메넬라우스가 안티오코스 4세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낙찰받아 헬레니즘화 정책을 뒷받침하기 시작한다. 

 

국제적인 영향력이 커진 로마의 영향으로 이집트 원정을 포기한 후, 안티오코스 4세는 레반트 지역 지배 확고화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BC169)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요새 아크라를 세운다. 그러면서 전 지배 지역의 헬라화를 공식 선포한다. 

 

BC167-142 마카베오 혁명

기원전 167년, 모데인의 제사장 마따디아의 저항으로 마카베오 혁명이 시작된다. 마카베오 혁명은 마따디아의 아들들인 마케베오라 불리는 유다 - 요나단 - 시몬으로 이어진다. 한 편, 이 시기는 넓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는 셀루싯 왕가의 내분과 왕자의 난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BC166 엠마오전투 유다가 엠마오에서 시리아 리시아장군의 보병 4만명, 기병 7천 명을 격퇴한다.

BC165 예루살렘 성전재봉헌 BC169 안티오코스 4세가 유린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고 봉헌했는데 이를 메노라 촛불 점화식인 하누카라는 절기로 기념한다.

BC162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63년에 죽고, 조카이자 전 황제인 셀류코스 4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가 로마를 떠나 안티오코스 4세 협력자들을 제거하고 시리아왕국을 접수한다. 그는 메넬라우스를 처형하고 아론의 후예인 알키모스를 유대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하고 하시딤은 이를 따르지만 알키모스는 알고보니 헬라파였다. 유다 마카베오는 계속 시리아에 저항하는 한편 로마와 접촉한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는 전면전을 벌려 유다 마카베오는 전사한다. 요나단이 유다를 계승한다. 

 

BC152 알레산더 발라스 (알렉산더 에피파네스)의 등장과 요나단의 외교술

안티오쿠스 4세의 다른 아들인 알렉산더 발라스가 시리아를 놓고 사촌 데메트리오스 1세와 경쟁하기 시작하자 양쪽으로부터 협력을 요청받고 이 틈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알렉산더 발라스 측을 선택한다. 데메트리오 1세는 전사한다. 알렉산더 측은 요나단을 대사제로 임명하고 진홍색 사제복을 선물한다. (BC153) 이는 사독 가문이 아닌 자가 대제사장이 되어 후에 문제가 된다. (대제사장이 될 수 있는 사독 가문이 아니었으며, 왕과 대제사장을 겸한 적이 없다.) 그 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개입하고 알렉산더 발라스는 기원전 145년에 죽임을 당한다.  데메트리오스 1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2세가 시리아의 왕이 된다.(BC145) 그러나 요나단은 그 이전부터 데메트로오스2세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여러가지 선물과 특히 사마리아 세 지역(아파이레마,리따,라마다임) 징세권을 삼백 달란트에 구입해 준 요나단을 데메트리오스 2세는 매우 좋아했다. 그는 그 이전에 셀류싯 왕가로부터 받은 요나단의 모든 권리를 인정해 준다.    

 

BC142 트리폰 장군의 쿠데타와 요나단의 죽음

데메트리오스 2세의 군인들은 대체로 그를 나쁘게 평가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더 발라스의 옛 장군 트리폰이 알렉산더 발라스의 아들 디오니소스를 안티오쿠스 6세로 옹립하고 안티오크에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요나단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요나단은 그를 구해주었지만 데메트리오스 2세는 요나단에게서 멀어진다. 

 

요나단은 트리폰에게 접근하고 셀류싯 왕가로부터 받은 모든 권리를 인정받고 선물을 받았다. 또한 로마와 스파르타와 우호관계를 다진다. 

 

한편, 트리폰은 안티오쿠스 6세조차 제거하고 자기 자신이 전면에 나선다. 화친을 가장해 요나단을 암살한다. 요나단의 형 시몬이 대제사장직을 승계한다. (BC142-134) 시몬은 다시 데메트리오스 2세에게 접근한다. 데메트리오스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이 때부터를 하스몬 왕가의 성립으로 본다. ("진정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시몬을 영구적인 영도자, 대사제로 삼는다."마카베오상 15:41)

 

BC142-63 하스몬 왕조

기원전 134년에 시몬은 두 아들과 함께 사위의 쿠데타로 죽는다. 시몬의 세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J. Hyrcanus Ⅰ, BC134-104)가 대제사장이 된다. 힐카누스의 시기에 셀류싯왕가는 힘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틈에 영토를 확장하고 이두매를 유대화하였는데 이는 경건한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또한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리심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한다. (BC128) 이 시기에 유대의 영토는 솔로문 시대의 영토에 필적한다. 이런 기세에 헬라파, 하시딤파,하스몬파 중 헬라파 유대인들은 자취를 감춘다. 하시딤은 서기관과 중간계층 중심의 바리사이파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상은 귀족과 제사장 중심의 사두개파 사람들로 재편된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에피큐로스 학파는 아니었다. 힐카누스는 하시딤에 가까왔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하시딤에 등을 돌리고 말년에는 사두개파를 지지한다. 

 

요한 힐카누스의 사후에 갈릴리를 영토로 편입시킨 아리스토불 1세가 짧게 집권한 후 갑자기 죽고 (BC104-103) 동생 알렉산더 얀네우스(A. Jannaeus,BC103-76)가 대제사장이 되는데, 아리스토불 1세의 아내였던 살로메 알렉산드라와 결혼한 사이이다. 과부와 결혼한 대제사장을 유대인들은 반기지 않았고, 얀네우스도 전혀 대제사장 같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집권기는 내부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됐지만 아리스토불 1세 시대 영토가 북쪽으로 확장됐다면 그의 시대에는 이집트 국경에 이르렀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 3세의 지원을 받아서 이루어졌다. 정복된 지역은 철저하게 탈헬라화하고 유대화시켰다. 로마는 당시 흑해 연안의 폰투스와 격전 중이라 레반트 지역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얀네우스는 자신에 반대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도발하여 6천 명을 학살한다. 6년에 걸친 내전으로 5만 명이 죽는다. 기원전 88년 바리새인들은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여 얀네우스는 크게 패하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바리새인들 800여 명을 십자가에 처형한다. 얀네우스는 전투 중 죽기 전에 바리새인들에게 화해를 요청했는데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 다음 왕위는 얀네우스의 아내이고 70의 나이인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이어받는다. (BC76-67) 대제사장직은 장남인 힐카누스 2세가 맡는다. 이 시기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장로회(게루시아-산헤드린의 전신)에서 실권을 잡는다. 사두개파들은 아리스토불 2세를, 바리사이파는 힐카누스 2세를 차기 왕으로 밀기 시작한다. 결국 알렉산드라 살로메가 죽자 형제의 난이 일어나고 아리스토불 2세가 왕이 된다. (BC67-63)

 

하스몬 왕가의 집사 집안인 이두매인 안티파터가 (안티파터 2세) 등장하여 실권한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고 인근 나바테아 왕국의 아레타스 3세와의 협약을 주선하고 이를 계기로 형제의 내전은 재개된다. 두 세력은 동시에 로마의 도움을 청하는데 기원전 65년에 폼페이우스 장군은 이미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하고 레반트 지역으로 남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폼페이우스는 아리스토불 2세를 지지했지만, 결국 힐카누스 2세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예루살렘은 불탔고 1만2천 명이 죽었다. 힐카누스 2세는 대제사장직을 받지만 정치적 실권은 없어진다. (BC63)

 

BC63-AD6 이두매왕조

 

안티파터 2세는 폼페이우스를, 아리스토불 2세와 힐카누스 2세는 카이사르를 지지했으며, 카이사르는 힐카누스 2세를 유대 분봉왕으로 삼았다. 이러한 힐카누스의 지지와 안티파터 2세의 발빠른 행보로 카이사르는 안티파터2세를 유대의 통치자로 임명한다. 장남 파사엘은 유대와 이두매의 행정관으로, 차남 헤롯은 갈릴리의 행정관으로 임명한다.  힐카누스 2세는 이두매 가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손녀를 안티파터의 차남 헤롯과 결혼시킨다. 

 

로마의 카시우스를 지지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힐카누스파가 실각하자 적대 세력인 아리스토불 2세의 아들 안티고누스는 안티파터의 아들 파사엘을 죽이고 헤롯은 로마로 도망간다. 로마에서는 안티고누스의 행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헤롯을 앞세워 반란을 진압한다. (BC37)

 

BC37-4 헤롯대왕 

 

헤롯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인의 왕에 임명된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혈통적으로는 이방인이다. 그런 약점으로 그는 친유대 종교정책을 펼치고 성전을 재건하며 동시에 힐카누스와 같은 하스몬 정적들을 제거해 나간다.  그는 사해에서 아스팔트를 추출하고 키프로스의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헤롯은 하스몬 집안 출신 아내 마리암네와 결혼했으나 간통죄로 엮어 처형한다. 그는 모두 10명의 아내가 있었다. 유대 사회는 헬라주의자들이 득세한다. 그의 사후에 아켈라오스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상속받고,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요르단강 동쪽 베레아를, 빌립보 1세는 갈릴리호수 동쪽인 골란 지역 등을 상속받는다. 딸인 살로메에게도 약간의 땅이 주어졌다. 하지만 모두 로마에서 승인하지 않았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 반란 진압의 악평으로 로마에서 파면하고 추방했다.(AD 6) 유대,사마리아,이두매는 로마 직할이 되었다. 빌라도는 본디오 5번째 총독이었다. 

 

안티파스(BC4-AD37)는 헤롯대왕의 아들들 중 가장 유능했다. 그는 배다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유혹해 아내로 삼았다. 헤로디아의 딸 춤추는 살로메는 빌립과 낳은 딸이다. 헤로디아는 안티파스의 배다른 형제의 딸이다. 안티파스는 전쟁으로  로마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 그런데 칼리큘라 황제의 절친 헤롯 아그립바 1세(37-44)는 헤로디아의 오빠였다. 그가 황제에게 삼촌인 안티파스의 부정을 고발하고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안티파스는 37년에 칼리큘라에게 왕위를 박탈당하고 갈리아로 추방당한다.아그립파는 사마리아인 어머니를 가진 안티파스와 달리 하스몬 가문의 피가 섞여 있었고 유대정통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 야고보를 죽였다.(사도행전 12장) 하지만 비유대인들에게는 헬라적인 의전을 행했다. 

 

빌립1세는 형에게 아내 헤로디아를 뺏기고 별다른 소식 없이 살다가 34년에 죽었다. 그의 왕국엔 비유대인들이 살았고 후에 아그립바 관할이 된다.  

 

헤롯 아그립바2세(44-70)가 있었지만 그는 명목상의 왕이나 마찬가지였고 대제사장이 되기도 하여 유대인들의 불만을 이끌어내고 모든 지역이 로마의 직할로 편입되었다.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성을 함락시키자(유대전쟁) 로마에 가서 행정관이 되었다. 


댓글

달란트 : 마태오 25:14-30의 비유, 고전 그리스, 마카베오서

2020. 11. 21.

『라이프성경사전』(생명의 말씀사 2006)에 의하면, 은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이다. 1드라크마는 노동자 1일 품삯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2』에 의하면, 델로스 동맹 당시 주력 군함인 200인(170명 노병+30명 중갑보병 호플리테스) 승선 가능한 군함인 삼단 갤리선(트리에에스) 1척을 건조하는 데 1달란트의 비용이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1탈란트는 6,000드라크마로, 당시 직공의 월수입을 15드라크마 정도로 본다. 400년의 차이가 있지만 드라크마는 장기에 걸쳐 양 변동이 미미하던 금속을 바탕으로 측정된 안정된 통화로 노동자나 병사 1일 품삭이 맞고, 매일 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군함 한 척의 건조에는  6,000 맨데이가 소요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유대의 금은 양금속비는 1:15이다. 별 얘기 없으면 은 단위 화폐이고 금인 경우는 금 200달란트 이런 식으로 말해 준다. 

 

  • 기원전 489년 페르시아제국에 배신한 식민도시 파로스섬을 공략하기 위해 배 60척을 동원했다. 그 때 파로스에 요구한 랜섬(합의금) 액수가 100달란트이다. 
  • 마라톤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파로스섬 공략에 실패하자 사형 선고를 받는데 이에 대한 보석금으로 50달란트를 선고받았다. 나중에 페리클레스도 민회에서 잘못된 국가 지도에 대한 벌금으로 50달란트를 선고받은 적이 있다. 
  • 밀티아데스는 이 돈을 못 갚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 키몬이 대신 갚아야 했다. 키몬은 살라미스해전의 영웅이다. 이 때 아테네의 부자 정치인 칼리아스가 키몬의 누이와 결혼하는 대가로 대신 갚아준다.  
  •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반격을 대비해 200척의 3단 갤리선을 건조한다. 건조비는 200달란트이다. 이 돈은 칼리아스같은 귀족 부자들이 갹출해서 마련한다. 
  • 살라미스해전에서 패전한 후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해전의 명장 그리스인 테미스토클레스에 200달란트의 현상금을 건다. 
  • 아테네는 페르시아전쟁 승리후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파르테논신전은 산단갤리선 건조 등을 위한 델로스 동맹의 국방비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 기금은 매년 500-600달란트씩 적립됐다. 
  • 아테네는 기원전 439년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말을 듣지 않는 도시국가 사모스를 삼단 갤리선 60척, 11,000명의 병력으로 점령한다. 이 때 아테네 지휘관은 페리클레스와 극작가 소포클레스였다. 그리고 전쟁 비용 1,400달란트의 배상을 요구했다. 약간 동쪽으로 가면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기원전 732-기원전 722)가 강대국 앗시리아에 바친 조공이 금 10달란트, 은 1,000달란트였다. 
  • 전성기 아테네의 시민은 3만 명 정도인데, 거주민은 6-7만명이다. 1년 국고 수입은 3,000달란트 정도였다. 
  •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에 아테네에 참전을 요청한 시칠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 세제스타가 분담하겠다고 한 액수는 60달란트이다. 이에 아테네가 준비한 시칠리아 원정 비용은 군선 100척과 호플리테스 5,000명으로 3,000달란트였다. 동맹국 병사까지 합치면 6만 명 정도가 참전한다. 그런데 실제로 세제스타가 갖고 있는 군비 보유금은 30달란트였다. 
  •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전한 아테네는 시라쿠사에 배상금으로 2,000달란트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6만 명의 원정군 중 생존자 7,000명은 지하 갱도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 아테네의 제1계급은 페리클레스,알키비아데스,소포클레스, 투키디데스 등을 들 수 있는데 각자가 1달란트 정도의 삼단 갤리선 한 척 정도는 만들 재력이 있었다. 

이제 외경인 『마카베오(상)(하)』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들이 있다. 기원전 142년 즈음 전후다.

  • 하스몬 가문의 셀루코스왕조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4세(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성전 유린(기원전 169년)에서 시작하는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은 400달란트와 금 200달란트밖에 없었다. 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한 기금과 토비아의 아들 히르카노스가 맡긴 돈이었다. 
  • 당시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지배 왕조에게 대제사장직을 사며 내건 금액은 은 360 달란트 현찰 + 외상 80 달란트였다. 또한 학교설립허가를 150달란트에 산다. 
  • 성전에서 일하던 메넬라우스는 대제사장 야손의 심부름으로 에피파네스왕에게 가서 야손보다 은 300달란트를 더 바쳐 대제사장이 되었다. 
  • 안티오쿠스 에피피네스가 이스라엘 성전에서 꺼낸 간 금품은 1,800달란트였다. 
  • 마카베오의 세력을 토벌하려는 셀루쿠스왕국의 니가노르 장군은 유다인 포로사냥으로 로마인들에게 바쳐야하는 배상금 2,000달란트를 마련하고자 한다. 1,000명의 노예 상인들과 선물 계약을 체결하는데 유대 노예 90명이 한 달란트이다. 
  • 셀루코스 왕조에 대한 유대 민족 독립군 장군인 요나단을 트리폰은 화친인 것처럼 속여서 포로로 잡고 그 랜섬으로 100달란트를 요구한다. 트리폰은 100달란트를 받지만 요나단을 석방하지 않는다.  
  • 셀루코스 왕가는 하스몬 왕가의 요빠, 게젤,예루살렘 점령에 대한 대가로 배상금 500달란트와 별도의 세금징수세 500달란트를 요구한다.이에 대해 하스몬 왕가의 시몬은 요빠와 게젤에 대해서는 합해서 100달란트 정도에 합의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 밖에

기원 66년 총독 플로우스(Gessius Florus)가 예루살렘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한 사건이 발생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거지라고 놀리며 동냥을 해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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