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성경사전』(생명의 말씀사 2006)에 의하면, 은 1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이다. 1드라크마는 노동자 1일 품삯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그리스인 이야기 2』에 의하면, 델로스 동맹 당시 주력 군함인 200인(170명 노병+30명 중갑보병 호플리테스) 승선 가능한 군함인 삼단 갤리선(트리에에스) 1척을 건조하는 데 1달란트의 비용이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1탈란트는 6,000드라크마로, 당시 직공의 월수입을 15드라크마 정도로 본다. 400년의 차이가 있지만 드라크마는 장기에 걸쳐 양 변동이 미미하던 금속을 바탕으로 측정된 안정된 통화로 노동자나 병사 1일 품삭이 맞고, 매일 일하지는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군함 한 척의 건조에는 6,000 맨데이가 소요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참고로 유대의 금은 양금속비는 1:15이다. 별 얘기 없으면 은 단위 화폐이고 금인 경우는 금 200달란트 이런 식으로 말해 준다.
- 기원전 489년 페르시아제국에 배신한 식민도시 파로스섬을 공략하기 위해 배 60척을 동원했다. 그 때 파로스에 요구한 랜섬(합의금) 액수가 100달란트이다.
- 마라톤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파로스섬 공략에 실패하자 사형 선고를 받는데 이에 대한 보석금으로 50달란트를 선고받았다. 나중에 페리클레스도 민회에서 잘못된 국가 지도에 대한 벌금으로 50달란트를 선고받은 적이 있다.
- 밀티아데스는 이 돈을 못 갚고 죽었는데 그의 아들 키몬이 대신 갚아야 했다. 키몬은 살라미스해전의 영웅이다. 이 때 아테네의 부자 정치인 칼리아스가 키몬의 누이와 결혼하는 대가로 대신 갚아준다.
- 아테네는 마라톤 전투 이후 페르시아의 반격을 대비해 200척의 3단 갤리선을 건조한다. 건조비는 200달란트이다. 이 돈은 칼리아스같은 귀족 부자들이 갹출해서 마련한다.
- 살라미스해전에서 패전한 후 에스더의 남편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해전의 명장 그리스인 테미스토클레스에 200달란트의 현상금을 건다.
- 아테네는 페르시아전쟁 승리후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 파르테논신전은 산단갤리선 건조 등을 위한 델로스 동맹의 국방비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이 기금은 매년 500-600달란트씩 적립됐다.
- 아테네는 기원전 439년 델로스동맹의 맹주로서, 말을 듣지 않는 도시국가 사모스를 삼단 갤리선 60척, 11,000명의 병력으로 점령한다. 이 때 아테네 지휘관은 페리클레스와 극작가 소포클레스였다. 그리고 전쟁 비용 1,400달란트의 배상을 요구했다. 약간 동쪽으로 가면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기원전 732-기원전 722)가 강대국 앗시리아에 바친 조공이 금 10달란트, 은 1,000달란트였다.
- 전성기 아테네의 시민은 3만 명 정도인데, 거주민은 6-7만명이다. 1년 국고 수입은 3,000달란트 정도였다.
- 펠레폰네소스 전쟁 시에 아테네에 참전을 요청한 시칠리아의 조그만 도시국가 세제스타가 분담하겠다고 한 액수는 60달란트이다. 이에 아테네가 준비한 시칠리아 원정 비용은 군선 100척과 호플리테스 5,000명으로 3,000달란트였다. 동맹국 병사까지 합치면 6만 명 정도가 참전한다. 그런데 실제로 세제스타가 갖고 있는 군비 보유금은 30달란트였다.
-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전한 아테네는 시라쿠사에 배상금으로 2,000달란트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다. 6만 명의 원정군 중 생존자 7,000명은 지하 갱도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 아테네의 제1계급은 페리클레스,알키비아데스,소포클레스, 투키디데스 등을 들 수 있는데 각자가 1달란트 정도의 삼단 갤리선 한 척 정도는 만들 재력이 있었다.
이제 외경인 『마카베오(상)(하)』에는 다음과 같은 단서들이 있다. 기원전 142년 즈음 전후다.
- 하스몬 가문의 셀루코스왕조에 대한 저항은 안티오코스4세(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성전 유린(기원전 169년)에서 시작하는데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은 400달란트와 금 200달란트밖에 없었다. 과부들과 고아들을 위한 기금과 토비아의 아들 히르카노스가 맡긴 돈이었다.
- 당시 대제사장 오니아스의 동생 야손이 지배 왕조에게 대제사장직을 사며 내건 금액은 은 360 달란트 현찰 + 외상 80 달란트였다. 또한 학교설립허가를 150달란트에 산다.
- 성전에서 일하던 메넬라우스는 대제사장 야손의 심부름으로 에피파네스왕에게 가서 야손보다 은 300달란트를 더 바쳐 대제사장이 되었다.
- 안티오쿠스 에피피네스가 이스라엘 성전에서 꺼낸 간 금품은 1,800달란트였다.
- 마카베오의 세력을 토벌하려는 셀루쿠스왕국의 니가노르 장군은 유다인 포로사냥으로 로마인들에게 바쳐야하는 배상금 2,000달란트를 마련하고자 한다. 1,000명의 노예 상인들과 선물 계약을 체결하는데 유대 노예 90명이 한 달란트이다.
- 셀루코스 왕조에 대한 유대 민족 독립군 장군인 요나단을 트리폰은 화친인 것처럼 속여서 포로로 잡고 그 랜섬으로 100달란트를 요구한다. 트리폰은 100달란트를 받지만 요나단을 석방하지 않는다.
- 셀루코스 왕가는 하스몬 왕가의 요빠, 게젤,예루살렘 점령에 대한 대가로 배상금 500달란트와 별도의 세금징수세 500달란트를 요구한다.이에 대해 하스몬 왕가의 시몬은 요빠와 게젤에 대해서는 합해서 100달란트 정도에 합의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그 밖에
기원 66년 총독 플로우스(Gessius Florus)가 예루살렘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를 강탈한 사건이 발생한다. 유대인들은 그를 거지라고 놀리며 동냥을 해주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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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리델보스 저/ 오광만 역, 『마태복음(상),(하)』(여수룬 출판사 1990/ 1987 영역본. 원본 네덜란드어 1951) 메타데이터 (0) | 2020.1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