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은 인간과 자연의 대화이고 인간의 이해에 대한 이해이다. 따라서 모든 과학은 이해에 바탕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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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기간 : 2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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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 기호학자를 만나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추리소설과 기호학은 닮았다!“이 우주는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다른 모든 가능성을 제외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이 진실이지.” -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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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단서 - 모렐리, 프로이트, 셜록 홈스
이 논문의 원제는 "Morelli, Freud and Sherlock Holms: Clues and Scientific method"이며 구글 검색에서 쉽게 얻을 수 있다.
추측적 패러다임
추측적 패러다임은 비본질적이고 하찮은 단서들을 추적해 본질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이 논문에서 설명하려는 진즈부르그가 '추측적 패러다임'(Conjecture Paradigm)이라고 명명한 과학적 방법은, 그에 의하면, 19세기말 사회과학(social science로 번역)에서 조용히 부상해서 한번도 조명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본문의 표현에서는 기호학적 패러다임(semiotic paradigm)이라고도 하고 헉슬리의 '자딕의 방법'(Zadic's Method)을 언급하기도 한다. 아포리즘적 접근 방식이라고도 표현한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토마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는 1962년에 나왔다. 진즈부르그가 추측적 패러다임에서 전제로 하는 기존의 과학 패러다임을 논문을 통해 살펴보면 '엄밀한'(rigour), '정량적인'(quantification),'체계적인'(systwmatic) 갈릴레오식 모델인데 핵심은 '예외적인 것보다는 전형적인 것을 연구'하는 것이며 추상화(abstraction)를 동반한다. 추측적 패러다임은 개별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서 본질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고 갈릴레오식 모델은 개별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을 다 제거해 나가면서 원형적인 본질에 이르는 방식이다.
추측적 패러다임의 역사
1874년경 죠바니 모렐리(Giovanni Morelli)라는 이탈리아인이 한 독일 미술사잡지에 레르몰리에프(Ivan Lermolieff)라는 필명으로 논문을 연재하여 미술작품 감정 분야에 파장을 일으킨다. 여기서 모렐리식 방법(Morelli's method)은, 그림을 감정할 때 작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모방 과정에서 가장 주의깊게 모방되므로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부분을 주목하면 안되고 인물화의 경우 귓불, 손톱, 손가락, 발가락 등 화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작은 단서에서 감정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968년 미술사학자 카스텔누오보(Enrico Castelnuovo)는 모렐리식 방법과 모렐리의 논문 발표 몇 년 후 코난 도일이 셜록 홈스에게 부여한 방법 사이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미술 감정가와 탐정은 보통은 사람들이 주의를 끌지 않는 작은 단서로부터 무언가를 발견해 낸다.
한편,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에 대한 연구에 돌입하기 이전에 모렐리의 글들을 접했으며 '미켈란젤로의 모세'(1914)에서는 모렐리를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기 훨씬 전에, 이반 레르몰리에프라는 러시아인 미술 감정사가 유럽의 화랑가에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중략)... 그는 그림의 일반적인 인상이나 중심인물 대신 사소한 부분 묘사, 즉 손톱이나 귓바퀴나 후광의 모양처럼 쉽게 지나치는 하찮은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모사가는 그런 것들을 모방할 때 소홀히 여기고 지나치지만, 진짜 화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식 가명 뒤에, 1891년에 사망한 모렐리라는 이탈리아인 의사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매우 흥미를 느꼈다. 내가 보기에 그의 탐구 방법은 정신분석학의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
추측적 모델은 기원으로 따지면 수렵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냥꾼들은 동물의 발자국이나, 용변, 깃털 등 사소한 단서들을 추적하며 생존한다. 주문이나 주술과 달리 이야기는 수렵 사회에서 자취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Seppilli, 1962) 이야기와 단서 추적은 모두 로만 야콥슨의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인접성을 기반으로 하고 인과 관계를 따진다. 유사성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과 특징은 엄격하게 배제한다.
이러한 기호학적 패러다임은 플라톤의 지식 이론이 등장하자 완전히 빛을 잃고 만다.
세 형제가 낙타 한 마리를 잃은 사람을 만나는데 발자국을 통해 그 낙타가 흰색이며, 한쪽 눈이 멀었고, 가죽 부대 두 개를 안장에 얹었는데 각각 기름과 포도주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는 민담이 중동 지방에 있다. 이 이야기는 아르메니아인 크리스토퍼가 만든 '세렌디포 왕의 세 아들의 여행담'에 소개되어 전유럽적 히트를 폈는데 월폴 수상의 아들이 책을 읽고 '세렌디피티'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1745년) 볼테르는 이 책을 읽고 '자딕'에서 재구성했는데 1880년 헉슬리가 다윈의 방법을 알리기 위한 강의에서 '자딕의 방법'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다.
추측적 패러다임의 가치
의학이나 역사학, 법률, 사건의 수사 등은 모두 불완전한 지식과 조각난 정보에 기반하여 간접적이고 추측적인 진단과 처방과 판결을 하기 때문에 기호학적 패러다임이 적용되고 개별적인 것을 추상화시키는 갈릴레오적인 방식을 따르기 힘들다.
1880년 허셸(William Herschel)은 '네이쳐'지에 벵골 후글리 지방에서 지문을 문서에 찍는 관습을 행정에 적용한 결과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1888년 골턴(Francis Galton)은 인체의 사소한 일부인 지문을 신원 확인 방법으로서 공식적으로 제안한다. 이 또한 벵골의 추측적 모델을 행정에 활용한 예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논문이 발표된 1980년 당시의 지적 배경과 관련하여 저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혼미해지고 체계적 지식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추측적 패러다임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역할이 오늘날에도 적용되는지는 생각해 봐야 한다. 칸트 헤겔이라는 세계사적 전망이 쇠퇴하면서 니체에서 아도르노에 이르는 아포리즘적 접근이 빛을 발휘한다. '아포리즘'은 의사인 히포크라테스의 책 이름이다. 아포리즘은 징후와 단서를 기초로 삼아 인간과 사회, 즉 병들고 위기에 처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견해를 형식화하려는 시도이다.
해석학과의 관계는?
이 논문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 대체로 진즈부르그의 이 논문이 다루는 영역은 해석학이 다루는 영역과 겹친다. 역사적이고, 개별적이며, 일반화가 힘든 정신 과학은 이해에 자연 과학은 설명에 토대를 둔다고 처음 주장한 것은 빌헬름 딜타이이이다. 해석학이 사람과 관계된다면 추측적 패러다임은 반드시 사람과 관계되는 것은 아니기에 해석학의 자향하는 바와는 방향이 같지만 추측적 패러다임이 다루는 영역이 더 넓은데 이를 주장하는 진즈부르그의 분야인 역사학은 사람뿐만 아니라 무생물적인 환경 또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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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 단위
1리라(리브르)=1파운드=1쾰른 마르크 = 1굴덴 : 은 325그램에서 시작하여 화폐 단위로 정착
1리라 = 20솔도, 1솔도 = 12데나로(드니에)=1수.
Ex1) 17세기 초 10솔도로 아주 검소한 하루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이탈리아 북부). 포도주 1L 1.5-3 솔도. 빵 500그램 5솔도.
Ex2) 혁명 전 프랑스의 숙련공 하루 일당은 1리브르, 즉 20수.
Ex3) " 조선공 한 사람의 임금이 바르셀로나에서는 1784년의 20수(카탈루냐 수)였던 반면 카디스에서는 28수, 서인도로 항해히는 선박 위에서는 37.5수 그리고 아바나 에서는 112수(3페소 푸에르테)였다" 피에르 빌라르
1파운드 = 20실링, 1실링 = 12페니.
Ex)18세기 초 1파운드는 현재 100파운드 정도로 어림 계산
1굴덴 = 20 그로쎈, 1그로쎈 = 12페니
Ex) 1434년 석공의 일당은 8그로소. 일용직 4그로소 반
데나로, 그로쏘, 페니도 원래는 동전 이름이었으나 동전은 없어지고 회계 단위가 됨
주요 동전
- 카룰로스 대제 (781-794)때 무게 1 리라(libbra, 영국 무게 단위로 1파운드)의 은으로 240개의 데나로 동전(은 1.7g)이 주조됨. 이 때부터 '리라'라는 회계 단위 등장.
- 1194년 grosso : 베네치아, 제노바에서 주조된 순도 높은 큰 은화(1.5-2g). 마르세이유 1218, 피렌체 1230, 잉글랜드 1350년에 주조됨.
- 1252 플로린(피오리니) 금 3.5그램. 동로마제국의 금화인 베잔트화, 중동의 금화인 만쿠스화를 대체하기 위해 만듬.
- 1284 베네치아에서 플로린을 따라서 두카트화를 만듬. 플로린은 중북부 유럽에서 주로 쓰이고 두카트화가 인기가 있었음. 1두카트는 2리브르 = 40솔디. Ex) 1578년에 보댕에 의하면 포르투칼에서는 면도비가 연 15 두카트로 프랑스의 6배였다.
- 스페인의 경우 14세기 말 레알화가 은 3.4그램( 2 데나로)
- 페소, 탈러 : 은 27그램으로
- 1탈러 = 24그로쎈, 1그로쎈=12페니히 Ex) 1700년에 병사는 연 10탈러를 받음. 18세기 초 닭 한 마리는 2그로쎈, 수말은 20탈러.
- 에큐(프) : 4.06그램 금화 = 6리브르. 루이는 24리브르.
- 크라운은 5실링 동전, 기니는 21실링 동전
- 금과 은의 양 금속비는 1:12. 금이 은의 12배.
더 이전으로 가면 (기원 전후)
금은 은의 15배 가치를 가진다.
1드라크마 = 1데나리온 : 3.8그램 은화. 1일 품삯. 이틀에 하루 일한다고 보면 됨. 즉, 하루 번 돈으로 다음 날까지 쓴다.
참세 두 마리 = 1/16 데나리온
금 1세켈(shekel) : 노동자 4일 품삯. 세켈은 밀 180알의 무게로 은 1세켈은 8그램이 조금 넘는다. 은 60세켈인 1미나 단위로 거래되었다. (약 500그램) 세켈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한다.
은1달란트 = 6000드라크마. 그리스의 삼단 갤리선 1척 건조 비용. 금의 경우 금 1달란트라고 한다.
Text:
17세기
피렌체 : 일용직 원수입 300솔디 정도.(15리라)
영국 : 뉴턴의 대학 연봉은 60파운드. 그밖애 튜터 교습비 등이 있었다.
18세기 중반
***영국 : 아담 스미스는 글래스고우 학장시절 연봉 150파운드를 받음. 가정교사로 이직하고 연금 300파운드를 받음. 런던에서 8개의 방이 있는 집을 빌리는 데 연간 200파운드가 들었다. 로마 중심가에서 같은 조건이면 12파운드면 됐다. 콜리지는 그 당시 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25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캔터베리 대주교의 연봉은 7천 파운드의 연봉을 받음. 보통의 주교는 3-400파운드를 받았다. 하급 성직자들은 30-50파운드였고 부제는 30파운드 미만이었으므로 다른 일을 병행해야했다. 비숙련노동자 주급은 5실링(지금 200파운드)으로 로빈슨 크로소우 초판 가격이다. 집안 하인의 1년 급료는 7-8파운드. 도서대여점 연회비는 12실링-1파운드.빵 한덩어리는 2.5펜스
***프랑스 :
"나는 아브빌의 방직공입니다. 아내와 함께 공장에 다닙니다. 열 살 짜리와 여덟 살 짜리 아이 둘을 기릅니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는데, 내가 하루에 20수(1리브르), 아내가 하루에 5수를 법니다. 일주일에 겨우 7.5리브를 법니다. 그 돈으로 집세, 식비, 옷, 광열비를 내면서 계산상으로는 일주일에 1리브르 정도 저축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 아플 때도 있으니 돈을 모으기란 불가능합니다."(주명철, '계몽과 쾌락' : 이 가족의 경우 일주일 빵값은 2리브르 2수 정도였다.)
"물지게꾼은 파리에 2만 명 정도 있었다. 하루에 30번 정도 물을 나른다. 7,8층 되는 경우도 있고 한번에 1.5-2수까지 받는다. 2수를 받고 30번 오르내리면 3리브르를 번다."(주명철, '계몽과 쾌락')
"프랑슈 콩테의 젊은 귀족은 연봉 300리브르를 받으려 군인이 되었고, 육군 소위 브라즐로뉴는 원호연금 500리브르를 받으며 힘겹게 살았다. 당시 숙련 노동자가 하루에 1.5리브르를 벌었고, 인쇄공은 하루 2리브르 이상을 벌었다. 1년에 280일을 일해도 400리브르는 벌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주교는 1년에 40만 리브르를 받았고, 재판장 몰레는 해마다 거의 35만 리브르를 받았다. 오를레앙공은 1740년에 금리 200만 리브르를 받았고, 혁명 전의 콩티공의 수입은 370만 리브르였다."(주명철, '계몽과 철학')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은 1716년부터 1782년 사이에 입장료가 거의 변동이 없어서, 가장 싼 자리가 1리브르에서 1.5리브르, 칸막이 좌석은 4-6리브르였다. 1760년대부터 생긴 로열박스는 연간회원권이 500리브르, 평생회원권이 3,000리브르였다."(주명철, '계몽과 쾌락')
콜베르는 여러 분야의 징세권 패키지를 경매에 붙였다. 예를 들면 소금세, 특별소비세, 소득세를 묶는 등. 1726년 경에는 6년에 한번씩 입찰을 갱신했다. 국가는 이 제도로 수입의 41-46%를 충당했다. 입찰보증금이 100만 리브르나 됐고, 1768년에는 156만 리브르였다. 징세업자는 왕에게 대출도 해주었다. 1755년에는 6,000만 리브르, 1768년엔 7,200만 리브르였다. 이자는 6%정도였다. 징세업자는 모두 40명이었다가 최대 87명까지 늘었다. 이들은 고정급 24,000리브르, 업무추진비 4,200리브르, 출장비 1,500리브르를 받았다."(주명철, '계몽과 쾌락')
***독일권
1773년 빈에서 피아노값은 300-700플로린. 고위직인 궁전 고문관의 연봉은 4,000플로린
19세기
1800 파리노동자 일당 7프랑. 샤르팡티에 문고판 3.5프랑
1824년 빅토르 위고가 파리의 작은 방 여섯 개, 하녀방, 호화로운 수세식 화장실이 딸린 집의 1년치 집세 625프랑. 값싼 식사 한 끼는 1프랑.
1830 런던의 숙련공 주급은 30실링. 수직공은 5실링. 저가 소설책은 5실링=60파운드
1831 파리에서 어지간한 부르주아로 살려면 한 해 6,000프랑이 필요했다. 숙련노동자는 1,000프랑을 벌기가 어려웠다.
1868 파리 중간 계급 월 수입은 400프랑. 런던은 연 1,000파운드
1841 아일랜드 우체국 직원 연봉 140파운드. 하급장교 200파운드.
19세기 중반 미국의 중하위노동자는 주급 20달러를 벌었다 ㄷ학교수 연봉은 1,500달러. 일반적인 변호사의 연봉은 4,000달러
20세기
1911 1파운드=현재 100파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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